황홀한 언어
황홀한 언어
  • 김혜식(수필가)
  • 승인 2013.10.20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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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식의 가요따라 세태따라
김혜식(수필가)

말로 천냥 빚을 갚고, 말로 떡을 하면 조선(朝鮮)이 먹고 남는다고 했다. 말의 무게를 두고 하는 말이다.

지난날을 뒤돌아보면 시행착오도 많았다. ‘돈’이라는 단어를 금기시하여 그 말을 입에 올리는 일 자체를 부끄럽게 생각한 때가 있었다. 돈의 노예가 된다는 사실을 속물로 여긴 까닭이다.

요즘의 젊은이들에 비해 현실성이 너무나 떨어지는 사고(思考)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대학생들이 주식에 투자하고, 경매에도 눈을 돌린다는 말이 들린다. 이재(理財)에 밝다고 해서 모두가 부자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하여 이재에 너무 둔감하면 지닌 재산도 크게 불리지 못한다.

이성에 대한 나의 편견도 그렇다. 사랑 법에도 가·감·승·제가 있는 것이거늘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리석은 테두리에 갇혀 살았다. 사랑만 있으면 결혼 생활이 무한 행복 할 줄 알았다. 사랑이란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뛰고 얼굴이 붉어지곤 했었다. 숙맥도 보통 숙맥이 아니었다. 그런 심성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내 밥그릇도 제대로 못 챙기는 경우가 있다. 이익을 위해선 굽실거릴 줄도 알고 자존심도 버려야 하는데 나는 그런 언행엔 아주 서투르다. 마음에 없는 말은 할 줄 모르고, 이문 남기는 계산법은 늘 틀린다. 이는 시대에 뒤떨어진 처세라는 걸 어찌 모르랴. 그러나 천성을 고치는 약은 없잖은가.

아무리 세상이 각박하다할 지라도 남녀 간의 사랑만큼은 계산 없이 열매 맺었으면 좋겠다. ‘사랑’ 그 자체 하나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이 지구의 어느 곳에 있을까.

법조인 아들을 둔 시어머니가 예비 며느리에게 과분한 혼수를 요구해 이를 고민하다가 자살을 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혼외 아들을 둔 고위 공직자가 언어의 기교만 부리다가 스스로의 덫에 묶기는 모습을 보고, 국민들은 비웃었다. “미안합니다.” 이 한마디면 그나마도 조금은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일인데도….

사랑이란 언어가 상품이어서도, 육체적 유희를 위한 추악한 본능이어서도 아니 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랑가로 알려진 ‘황조가(黃鳥歌)’를 불러보자. 긴 세월 사랑 유지를 위해선 이런 사랑이어야 한다.

‘펄펄 나는 꾀꼬리/ 암수 사이좋게 노니는데/ 나는 외로움을 새기며 누구와 함께 돌아갈꼬’

고구려의 유리 왕이 지었단다. 일등 서정시다. 떠나간 여인을 그리워할 뿐, 원망하거나 독기를 품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 조상들의 사랑법이다.

왕은 비첩이던 치희가 같은 처지의 화희와 대판 싸우고 한 나라로 돌아가자, 이에 슬픔을 참지 못하여 이 노래를 지어서 불렀다고 한다. 옛날에도 남녀의 사랑은 이렇듯 환희와 슬픔이 공존했었나보다. 싸늘한 가을바람이 불어온다. 가을은 상실과 수확의 이율배반적인 계절인지 모른다. 스치는 찬바람에 가슴의 온기마저 식어간다.

삶에 윤기를 보태고, 스러지는 청춘을 일깨울 황홀한 언어 ‘사랑’으로 쓸쓸한 이 가을을 채색해 보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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