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다, 땡볕
반갑다, 땡볕
  • 이수안 <수필가>
  • 승인 2013.08.18 21:3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포도밭에서 온 편지
이수안 <수필가>

정수리를 달구며 내리쬐는 땡볕이 맹렬하다. 열흘 넘게 계속되는 더위다.

라디오를 틀면 프로그램마다 폭염과 더불어 전력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국정원의 선거 개입 사건으로 국회청문회가 열리고 촛불시위가 한창이지만, 이상하게도 폭염 이야기가 뉴스 시간을 더 차지한다는 느낌이다.

냉방기 가동을 전면 중단한 공공기관의 높은 실내온도, 실내 적정 온도 규제에 묶인 호텔 업계의 어려움, 아스팔트 열기에 삼겹살 굽기 등등. 그만큼 큰 뉴스거리가 된 폭염이지만 나는 땡볕이 반갑기만 하다.

올해 중부지방의 장마는 기상 관측 이후 최장기간이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햇빛이 없으면 포도가 잘 익지 않는다. 장마가 끝났다는 예보 후에도 비는 며칠간 더 왔다. 나는 애가 탔다. 더디게 익는 나무의 포도송이를 솎아내고, 특별히 포도를 잘 익혀준다는 미생물과 영양제를 몇 차례나 토양에 살포하고, 덧순도 더 알뜰하게 따 주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지만 포도가 제맛을 내지 못해 전전긍긍한 나날이었다.

신맛이 강하던 포도 맛이 좋아진 것은 나의 노력보다는 땡볕의 영향이 더 컸다. 오랜 장마에 일을 못 하던 잎새들이 땡볕을 만나자 신명나게 광합성을 한 것이다.

잎새가 보내주는 포도당을 부지런히 받아먹은 포도는 하루가 다르게 단맛이 올랐다. 그러니 땡볕이 얼마나 반갑겠는가. 직장인들은 높은 실내온도 때문에 어려움을 겪지만, 나는 이글거리는 땡볕이 고마워 발걸음이 절로 가벼워지는 것이다.

땡볕이 반갑기는 복숭아 재배 농사꾼들도 마찬가지다. 길 건너 복숭아밭 집에서 먹어보라며 못난이 복숭아를 들고 왔다. 더위에 발갛게 열이 오른 얼굴이지만 땡볕이 싫지 않은 표정이다. 손으로 복숭아 껍질을 훌렁 벗겨 한 잎 베어 물자 입안 가득해지는 과즙과 함께 특유의 향이 물씬 풍긴다. 요즈음 강렬해진 햇빛 덕분에 단맛이 좋아졌단다. 일조량이 부족하고서는 나올 수 없는, 과연 햇사레복숭아 다운 뛰어난 맛이다.

이곳에는 사실 올봄 꽃샘추위에 복숭아나무가 많이 얼어 죽었다. 애지중지하던 나무가 그 지경이 되었으니 농사꾼은 실의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전체가 죽은 것도 아니어서 일을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병충해 방제, 물 관리, 풀 관리 등 모든 일을 그전처럼 해야 했다.

수확이 보장되지 않는 밭에서 일은 똑같이 해야 하는, 참 맥 빠지는 상황이었지만 다시 힘을 내야 했다.

농사꾼들은 내년 봄 죽은 자리에 새 복숭아나무를 심고 가꾸리라 마음 다잡았다. 무너져 내리는 마음 곧추세우고 살아남은 복숭아나무를 가꾸었다. 하늘이라고 어찌 농사꾼들의 기운 빼는 일만 하겠는가. 풍부한 햇빛으로 단물 가득한 복숭아를 가꾸게도 해 주니 땡볕이 그저 고마운 것이다.

폭염도 이제 서서히 물러갈 거라는 예보가 나왔다. 습기 많은 남서풍이 북풍으로 바뀌면서 밤의 열기가 빨리 식어 열대야도 차츰 사라지고 공기도 건조해진다는 것이다.

폭염은 물러갔지만 예년처럼 가을장마가 시작되지는 않을 모양이다. 여전히 30도를 웃돌거라는 예보에 실망하는 이가 적지 않은 모양인데, 유독 농사꾼들만 반갑다는 표정이다.

농사꾼도 남들처럼 더위를 탈 줄 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더위에는 어지럼증도 느끼고 땀띠도 난다. 하지만 시시각각 맛이 좋아지는 과일을 생각하면 땡볕아 반갑다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