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년 전 천안·항저우 선비의 만남
247년 전 천안·항저우 선비의 만남
  • 조한필 기자
  • 승인 2012.10.03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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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조한필 부국장(천안·아산)

"이 풍진세상에서 공을 뒤늦게 안 것이 참으로 부끄럽네꿈에도 그리운 얼굴 여전히 눈에 선한데, 다시 객관을 엿볼 기약이 없습니다."

담헌 홍대용(1731~1783)이 항저우 선비 엄성(1732~1767)으로부터 받은 '쪽지 편지'다. 담헌은 1765년 중국사행길의 숙부를 따라 베이징에 갔다가 엄성을 만나 깊은 우정을 쌓았다. 당시 사나흘 건너 만났는데 이토록 그리워했다.

지난달 27일 개막한 천안박물관 홍대용 특별전에 이들의 뜨거운 교우관계를 엿볼 수 있는 유물들이 있다. 담헌은 천안 수신면 장산리에서 태어나 죽은 후 고향에 묻혔다.

엄성은 과거시험을 보러 베이징에 와 있었다. 담헌은 한글기행문'을병연행록'에서 일곱 번 만난 이야기를 그림처럼 그려내고 있다.

만남은 우연이었다. 한 수행군관이 귀한 안경을 구하려고 유리창(베이징 골동품거리)을 헤매다 안경 쓴 두 선비를 만났다. 엄성과 열 살 어린 반정균이었다. "친한 사람이 눈병(근시를 말하는 듯)이 있어 안경을 구하는데 구할 수 없다. 그대들은 중국 사람이니 다른 것을 구할 수 있으니 나에게 팔 수 없느냐." 그러자 이들은 안경을 벗어 주면서 "사소한 기물인데 어찌 매매를 논하겠느냐"며 사례를 피했다.

군관은 담헌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며 만나볼 것을 권했다. 이들은 만나자마자 의기투합해 서로 백년지기처럼 대했다. 매번 경서ㆍ시ㆍ풍속 등에 대해 필담하다 보면 금세 하루해가 갔다. 이들은 항상 이별을 아쉬워하며 눈시울을 적셨다. 어린 반정균은 엉엉 울다시피 했다.

반정균이 예서글씨 책을 선물하니 담헌이"나에겐 중의 빗과 같으니 부친께 드려야겠다"고 했다. '중의 빗'고개를 갸우뚱했다. 담헌이"머리털 없는 중에게 빗은 소용없다는 뜻"이라고 설명하니 엄성이 자신의 변발한 머리를 가리키며 "나도 빗질한 곳이 없다"고 말해 웃음이 터졌다.

특별전에선 선물로 받은'한예자원(漢隸字源)'과 담헌 소장인을 볼 수 있고, 엄성의 초상화에서 빗이 필요없는 머리를 확인할 수 있다.

담헌은 중국에서 돌아온 2년 후 엄성의 부고를 받는다. 엄성은 담헌이 선물한 조선 먹과 향을 가슴에 품고 젊은 나이에 죽었다. 가족들은 관 속에 먹을 넣어 장례 지냈다고 한다. 담헌은 슬픔을 억누르며 제문을 지어 중국으로 보냈다. 이 제문은 엄성이 죽은 지 꼭 2년 되는 제삿날 도착했다. 많은 사람들이"죽어서도 서로의 마음이 통했다"며 놀랐다.

우리는 엄성 덕분에 홍대용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의 형이 보내온 엄성의 문집에 엄성이 그린 담헌 초상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담원의'절친'박지원이 지은 묘지명에 따르면 이들의 우정과 함께 담헌의 이름이 당시 절강(항저우가 있는 성)에 널리 전해졌다고 한다.

현재 천안시는 홍대용과학관을 2014년 초 개관 목표로 생가터 가까이 짓고 있다. 또 담헌(건물명)ㆍ농수각(천체관측 연못) 등 생가 복원도 추진 중이다. 엄성이 지은 담헌팔경시(八景詩)가 생가에 걸릴 날도 멀지 않았다. 이참에 이들의 우정을 토대로 항저우와 자매결연을 추진하면 어떨까.

"제1경 향산루에서 거문고를 타다 그윽한 사람은 먼 밤을 아끼니, 일어나 앉아 거문고의 붉은 줄을 다스린다. 다락이 높으면 천하가 고요하니."

16세부터 배운 거문고가 달인 수준이던 담헌은 중국 여행에도 거문고를 가지고 갔다. 지구자전설과 인물균등론을 편 북학파의 리더 담헌. 반정균을 울린 거문고 소리 들으러 특별전에 가자. 12월 9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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