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병
마흔 병
  • 반지아 청주 초롱꽃유치원 행정부장
  • 승인 2024.05.12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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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반지아 청주 초롱꽃유치원 행정부장
반지아 청주 초롱꽃유치원 행정부장

 

가끔 눈앞이 흐릿해진다. 신나서 말하다가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주춤하다 맥이 끊기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날이면 날마다 얼굴에 화장품을 바르는 일보다 닦아내는 일에 사력을 다해도 아침마다 거울을 볼 때면 하루가 다르게 푸석해지는 피부를 확인하는 날이 허다하다. 게다가 경력이 하루하루 더해지면 더해질수록 위에서 하는 소리는 가슴을 조이고 밑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입술을 마르게 한다. 스타벅스 MD 상품이 뭔지는 엊그제 알았어도, 유치원생인 아들 또래 애들과 미니특공대 멤버 이름, 상징하는 색깔, 무기나 로봇에 대해서는 몇 시간이고 이야기 나눌 수 있고, 공룡 만화인 고고다이노 실사판 뮤지컬을 보러 가서는 아들보다 더욱 초롱초롱한 눈으로 배우들과 눈을 맞출 수 있을 만큼 나는 아직도 철이 없는데 세월을 거스를 수 없는 육체가 늘 잔인하게 상기시켜 준다. 넌 성인이라고. 그것도 파릇파릇한 새내기 성인이 아닌 나랑은 관계없는 줄 알았던 중년이라는 새로운 테두리가 서서히 그 윤곽을 드러내고 있는 딱 그 지점. 거기에 서 있는 나이라고.

그럼에도 늘 고수하는 앞머리 덕에 나이보다 어려보인다는 말을 들어왔었다. 그 말이 칭찬이 되는 시기를 지나 언젠가부터는 으레 하는 말이겠거니 하고 넘기던 어느 날, 나를 처음 본 사람으로부터 “X 세대” 아니시냐는 말을 듣게 되었다. X 세대의 정확한 정의를 모르는 상태에서도 본능적으로 저 사람은 내 나이를 얼추 예상하는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 이제는 으레 하는 말조차도 실례가 될 수 있는 나이에 접어든 거야, 제 나이로 봐주는 게 되려 예의가 될 수 있는 거지, 하고 머리는 이해했지만, 괜스레 마음이 울적했다. 더 이상 어려보이지 않는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나는 왜 이렇게 나이를 많이 먹어버린 걸까.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게 살아가고 있는데 어찌 세월은 게으름이라곤 하나도 피우지 않고 언제 이렇게 나이를 쌓아놓은 걸까. 이제야 느껴지는 이 무게를 그리고 앞으로 더 버거워질 이 무게를 앞으로 얼마나 짊어지고 살 수 있을까. 하는 조금은 건방지고 살짝 허무맹랑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저었기 때문이다.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이 얽혀 있는 이 마음을 믿을만한 사람에게 살짝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은 너무나도 단순했다. “그거 마흔 병이야. 마흔이라는 나이가 어떻게 보면 그동안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게 되는 나이거든. 수명의 절반쯤 왔다고나 할까. 그러니 마음이 싱숭생숭할 수밖에. 하지만 너무 오래 붙들려 있지는 마. 조금씩 조금씩 소화를 시켜야 남은 생도 살아가지.” 첫 문장을 읽자마자 `마흔 병'이라는 단어 덕에 헛웃음이 났지만, 줄줄이 올라오는 진지한 답변에 입술을 꼭 닫고 정독하다 문득 `돌치레'가 떠올랐다.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아이들이 태어나서 돌쯤 되면 대부분이 한 번쯤은 겪고 지나간다는, 고열이 가장 대표적인 증상인 병. 돌치레. 그것처럼 마흔이 가까워지는 사람들도 원인도 모른 채 마음의 고열을 견디고 넘어가는 걸까.

한번은 지인과 통화를 하다 애들은 요새 안 아프냐는 질문에 “뭐 좋은 거라고 유행하는 병은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어요.”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그런데 문득 내가 아이들 탓을 할 입장인가 생각해보게 된다. 10대에서 20대로, 20대에서 30대로 그리고 그 이상을 준비하면서 늘 마음 앓이를 했고,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현타(현실자각타임)가 세게 온다는 홀수 연차마다 발을 동동 굴렀으며, 회의감이 찾아온다는 10년 차에는 모든 발걸음이 터덜터덜했다.

앞으로 뭐가 더 남았을까. 기대조차 두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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