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영덕의 실크로드 견문록 <55>
함영덕의 실크로드 견문록 <55>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07.25 10: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베즈크리크 천불동 계곡 Ⅱ

무지가 앗아간 수탈의 상흔만 덩그러니…

   
▲ '베제크리크'라는 뜻은 위구르어로 '아름답게 장식된 집'이라는 뜻으로 화염산 한쪽의 계곡에 위치한 6~13세기에 걸쳐서 만들어진 석굴이다. 그러나 이슬람교도의 투르판 침공때 상당수의 석굴이 파괴되었고, 그나마 파괴를 면한 석굴도 청조말 서구열강의 탐험대에 의해 모두 뜯겨져 나가고 말았다. 현재는 50여개 석굴중 8개 석굴만이 일반에 공개되고 있을 뿐이다.
독일 탐험대, 투르판 일대 1902년~1914년까지 탐사

이 석굴은 러시아의 클레멘츠에 의해 학계에 알려졌고, 독일인들에 의해 1920년부터 4차례에 걸쳐 조사된 바 있다. 이 석굴의 벽화들은 20세기 초까지 잘 보존되어 있었으나 독일 그룬베델과 르콕, 바르투스와 외국의 탐험대들이 드나들면서 벽화와 소조불상들을 마구 절취해 가서 알맹이는 거의 사라지고 형체만 그 옛날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이 수난의 역사는 이슬람세력의 침탈과 20세기 외국탐험대에 의한 벽화반출 경쟁에서 비롯되었다.

처음으로 들어간 17호 석굴 천장의 벽화는 거의 훼손되어 있었다. 진흙으로 만든 벽면에 두 개의 부처상 본체는 없어지고 광배의 뚜렷한 윤곽만 과거의 모습을 연상케 하고 있다. 20호 석굴도 벽화 몇 점을 액자에 넣어 전시하고 있었고 26호 석굴도 절취당하고 남은 잔해만 보여주고 있다. 27호 석굴은 진흙으로 만든 벽화의 모습은 사라지고 불화의 광배만 윤곽이 뚜렷이 남아 있다. 벽면에다 진흙을 발라서 벽화의 모습이 거의 훼손되어 있다. 31호, 33호 석굴 벽화도 진흙으로 발라져 있어 벽화의 가치는 거의 훼손되어 있다. 가냘픈 짚을 잘게 썰어 진흙으로 뭉쳐서 벽면을 바르고 그 위에 색을 칠한 벽화는 프레스코 기법으로 만들어졌다. 39호 석굴도 벽면을 붉은 벽돌로 쌓고 그 위에 진흙을 바르고 부처의 상을 만들어 놓은 것을 볼 수 있는 굴이다.

석굴 가운데 쏟아낸 벽돌의 잔해 진흙가루를 유리와 철책으로 보존하고 있어 석굴의 벽면처리나 내용물들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독일 탐험대가 절취해간 석굴의 모습들을 바라보노라면 마치 내 가슴이 난도질 당한 것 같았다. 르콕과 바르투스가 이곳에 와서 프레스코 벽화들을 도려내어 떼어 가는 장면들이 눈 앞에 선명하게 떠올라 분노가 끓어 올랐다. 피터 홉커크(Peter Hopkirk)가 쓴 "실크로드의 외국인 악마들(Foreign Devils on the Silk Road)"에서 천불동 계곡에서 자행되었던 벽화와 고문서 절취사건들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님을 통감하게 하는 증표들이다. 자기 문화의 소중함을 모르는 무지함이 더없이 소중한 문화재를 불소시게나 비료, 석가래 기둥으로 사용하는 안타까움은 중국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일본이 자행한 우리문화 침탈과 반출이나 이슬람교도들이 우상숭배를 배격하고 파괴하는 종교적 행위들은 그 배타성으로 인해 중요한 인류문화유산을 파괴하는 주요인이 되었다. 또한 무지한 현지인들의 문화적 몰이해는 중요한 문화유산을 헐값에 유출하는 비극적인 사건을 유발시켰던 것이다.

독일 탐험대가 투르판 일대를 최초의 탐험지로 선택하고, 1902년에서 1914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탐사를 감행하였다. 르콕과 바르투스는 우루무치에서 중 국령 투르키스탄 안으로 160km를 들어와 투르판에 도착했다. 원주민들은 바르투스를 보고 날뛰듯이 환영하였다. 1년 전 그룬베델과 함께 왔을 때 좋은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다.

1904년 11월 18일 두 사람은 카라호자에 도착했다. 투르판 동쪽 사막에 있는 진흙 벽으로 건축된 이 거대한 고대 도시의 한가운데서 높이 180의 마니교 창시자 마니의 초상화를 발견하는 개가를 올렸다. 이후 출토된 유물들을 보아도 8세기 중엽 카라호자(고대 명칭은 '코초')에서 마니교가 번영을 누렸던 것은 명백해 졌다. 약 5세기 전 페르시아에서 마니에 의해 창시된 마니교는 이단적인 사상 때문에 기독교도와 무슬림, 조로아스터교 등 다른 종교 신봉자들에게 격렬한 적개심을 불러일으켰고, 마니는 조로아스터교 승려들과의 논쟁에서 패배하자 이단자로 낙인 찍혀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박해를 피해 500여명의 마니교도가 동쪽으로 싸마르칸트까지 도주해 오면서 불교의 영향을 받으며, 카라호자까지 도달했다. 독일 탐험대가 그곳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마니교의 굉장한 유물은 파손된 후였다. 르콕은 카라호자에 있는 이 고대 도시의 성벽 바깥에서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의 사원을 발견하는 또 하나의 개가를 올렸다. 성직자와 신도들이 나뭇가지를 들고 있는 모습을 비잔틴 양식으로 그린 벽화가 남아 있었다. 이곳에서 발굴을 마치고 르콕은 베즈크리크 불교 석굴사원으로 갔다.

르콕과 바르투스가 도착했을 때 이 동굴들은 염소를 치는 목동들의 간이 숙소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들은 석굴 안을 탐사한 후 놀랍고도 귀중한 그림들을 발견하고 어떠한 비용과 희생을 치르더라도 벽화를 뜯어내어 가져가기로 결심하였다.

그들은 먼저 아주 예리한 칼로 벽화의 외곽 둘레에 깊은 칼자국을 냈다. 그것은 벽화 밑층을 이루는 점토와 낙타 똥과 잘게 썬 짚과 스투코(벽에 바른 회반죽)를 관통하는 칼질이었다. 다음으로 벽화 옆의 바위에다 곡괭이, 망치, 정으로 구멍을 뚫어 거기에 여우꼬리 톱을 집어넣었다. "표면층의 상태가 매우 나쁠 때는 사람을 고용해서 펠트를 싼 널판지로 벽화를 단단하게 밀고 있게 했다"는게 르콕의 설명이다. 그런 다음 벽화의 톱질이 완전하게 끝나면 벽화가 얹힌 널빤지를 조심스럽게 떼어 윗부분부터 기울여서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렇게 해서 벽화는 널빤지 위에 수평으로 놓이게 되었다.

대형벽화는 통째로 운반할 수 없으므로 톱질을 해서 몇 조각을 냈는데 얼굴이나 미학적으로 중요한 부위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들은 근처에 있는 또 다른 불교 사원지를 간단히 탐사했다. 이번에도 7세기의 프레스코 벽화와 자수품, 필사본이 나왔다. 그들은 '조각된 곳'이라는 뜻의 토육으로 자리를 옮겼다. 르콕은 이 지역이 타원형의 씨 없는 포도로 유명한데 건포도로 만들어져 동쪽으로 4개월 여행거리인 북경에서 팔릴 정도였다고 말했다. 마을에서 계곡을 타고 상류로 올라가 열 개가 넘는 사원을 발견했으나 모두 폐허였다. 산허리에 깎아지른 듯한 벼랑에 제비 둥우리처럼 매달려 있는 꽤 큰 승원도 만났다. 꼬불꼬불한 계곡의 석굴 사원 한 가운데서 르콕은 다량의 종교문헌을 두 자루 정도 건질 수 있었다.

르콕은 투르판을 떠나기 전에 바르투스와 만나기로 약속한 카라호자에서 재회했다. 그는 바르투스가 쉬팡의 유적에서 '기적의 전리품'이라 할 수 있는 초기 기독교 필사본들을 발굴해 낸 것을 알았다. 5세기 성 시집, 마태복음과 니케아 성경의 일부, 헬레나 여왕이 예수의 십자가를 찾은 이야기와 세 왕이 아기 예수를 방문한 이야기가 기록된 문서들이었다. 너무나 흥분한 바르투스는 바퀴 두 개 달린 중국 수레에 필사본을 가득 실은 채 도중에 한 번도 쉬지 않고 카라호자까지 단번에 달려갔다고 한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The Description of the World) 59장에서도 유구리스탄은(Iuguristan) 상당히 큰 지방이며, 대카안에 속해 있다. 그곳에는 도시들과 많은 촌락이 있지만, 가장 주요한 도시는 카라호초(Carachoco)이다. 이 도시는 그 아래에 다른 도시와 촌락들을 거느리고 있고 주민들은 우상숭배자들이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들이 많고 얼마간의 사라센들도 있다. 기독교도들이 우상숭배자들과 결혼하는 경우도 아주 흔하다. 폴로가 얘기하는 유구리스탄은 '위그르인들의 땅'을 의미하며 카라호초는 수 당대까지 중국에서는 가오창(高昌)을 의미하는 지명이다. 13세기 마르코 폴로가 이곳을 여행할 때만 해도 이곳은 불교를 믿는 고장이며, 기독교도와 이슬람이 공존하며 사이좋게 살았던 곳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실크로드를 통하여 동서 문화와! 문물은 물론 영향력 있는 다양한 종교가 교류되고 흥망성쇠를 되풀이하는 과정을 겪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많은 유산과 유물들이 남겨진 이 사막의 교통로야 말로 인류의 가장 위대한 유산이다.

천불동 계곡일대는 훠얀산(火焰山)으로 투르판 분지 북단의 동서에 걸쳐 100km에 이르고 제일 넓은 곳의 폭이 10km에 이른다. 이곳 사람들은 '쿠즈로타고'라고 부르는데 위구르어로 빨간 산이라는 뜻이다. 평균 해발 500m에 이르며 최고봉은 851m 정도의 고지이다. 천불동 계곡 아래로 늘어선 포플러 숲 사이로 붉은 황톳물이 흐르는 소리를 들으니 이곳에 사람이 살았던 것을 겨우 실감할 수 있었다. 훠얀산 일대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고 새 한 마리 날아다니지 않는 곳이다. 한 여름에는 아주 무덥기 때문에 연기가 나고 검붉은 산이 날아다니는 용처럼 웅장하다. 태양열에 이글거리는 훠얀산을 뒤로하고 계곡 석굴에서 해탈을 염원하며 수도를 하였던 스님들의 모습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여졌다. 수많은 수도자들이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박해와 학살을 당하였던 흔적들을 종교와 인간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토굴 한편에서 구도의 세계를 염원하며 죽어간 선인들을 생각하며 삼배를 올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