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발자취를 찾아서 <30>
기독교의 발자취를 찾아서 <30>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07.19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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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시일반 정성모아 반석위에 세운 믿음
1920년 9월 송마리아 여사에 의해 설립

한가한 사람이 노닐다 가는 곳, 한계리의 초대교회

지리적으로 백두대간의 줄기와 행정구역으로 청주시 경계선이 만나는 곳, 미원방면으로 조금 달리다보면 SK주유소가 있고 추정재라고 쓰인 도로 표지판이 보인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방향을 틀면 한계저수지 이정표가 보인다. 비상리 임도에 이르고 커다란 느티나무를 지나 한계저수지 이정표를 따라 노계1리, 노계2리가 그림처럼 펼쳐지는 전형적인 농촌마을 깊숙이 대한예수교장로회 황청교회(담임목사 임영택)가 있다. 예전에는 노계리를 조리형국을 닮았다하여 조리터라 불렀으며, 한시울 방죽이 있었던 곳으로 한계리를 한가한 사람이 개울가에서 노는 곳이라 했다. 그러나 한계저수지가 생기면서 실로 한가한 사람들이 와서 낚시를 즐기는 곳이 됐다. 황청교회를 찾은 날은 지루한 장마의 끝자락, 본격적인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멀리 십자가를 따라 들어 갔다.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교회마당 그득히 그늘을 만들고 오고가는 사람들에게 아늑한 쉼터를 제공하고 있다. ▲ 김 장로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황청교회 성전을 새로 짓고 처음 찍은 김장로부부 모습.
지난 1999년 1월 이곳 황청교회에 부임한 임영택 목사는 황청교회의 산증으로 일컫는 김득수 장로 가정으로 안내했다. 황청교회의 역사는 충북 최초 교회인 신대교회와 같은 해인 1901년에 설립된 가덕면 노계교회와 무관하지 않다.

1900년대초, 충북에 복음이 처음 전해질 무렵 청주에서 서울로 통하는 길목을 따라 복음이 전해졌는데, 노계리는 상주, 보은을 거쳐 청주를 지나 서울로 통하는 길목으로 장꾼들이 청주에서 쉬지 않고 노계리에서 쉬어 갔던 곳으로 대로변에 길손과 말이 쉬어가는 주막집이 있었다.

노계교회는 이무렵 장꾼들의 영향을 받은 이마을 서춘경에 의해 설립됐다. 서춘경은 영동, 황간 등지로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는 등 열심으로 복음을 전했으나 무슨영문인지 노계교회는 곧 문을 닫았다.

황청교회의 설립

노계교회가 없어진 연대와 사연은 알 수 없으나 이마을에서 노계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던 송마리아에 의해 황청교회가 1920년 9월 설립됐다.

이에 앞서 송마리아는 북 감리파 교인 송태용의 딸로 남일면의 믿지 않는 집으로 출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집의 핍박을 무릅쓰고 멀리 떨어져 있는 노계교회에 출석하며 신앙생활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노계교회가 문을 닫은 이후에도 한결같이 이웃마을 벌뜸과 점촌으로 열심히 전도한 결과 몇명의 신자가 생기자 청주읍교회 전세종 집사를 초빙해 전 집사 집에서 김여권씨 가족과 김한나씨 등이 예배를 보기에 이르렀고, 1921년 오사라 지춘호씨 등이 예배를 올리면서 전세종 집사를 영수로 세워 강단을 지켜 나갔다.

갖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더욱 열심히 전도한 결과, 마침 황청교회가 성립되고 예배당까지 건축하게 됐다. 이후 송마리아 여사의 남편 김영기도 감화를 받아 이교회 신자가 되었으며, 후에 그 부부가 모두 청주읍교회 집사가 되어 청년을 위한 사업에 열심히 활동했다. 이것은 신자가 주님을 위한 봉사를 하여 향기를 발한 좋은 예로 전해지고 있다.

황청교회 초기에는 청주 동북 구역에 속하게 되어 소열도 목사, 조사 곽경환, 김정현 등이 시무하면서 교회는 나날이 발전하던 중 일제강점기 교회 종을 떼어가고, 지붕에 함석을 걷어가는 등 시련을 겪으면서 일시 문을 닫기도 했다.

1946년 최도진씨가 사재로 개인집을 사서 예배당으로 사용하게 되면서 교회는 다시 재건됐다. 그러나 1956년 예장과 기장으로 분립되면서 오늘날 황청교회와 상아교회가 되었다.

지난 1980년대초 현 예배당을 신축하면서 장립한 김득수 장로는 노계교회 교인이였으며, 황청교회 권사로 신앙생활에 모범을 보였던 최종일씨의 아들로 송마리아 여사의 손자다.

1970년대 말 교회는 새성전 건축을 앞두고 처음 계획과는 달리 여러 장애가 있었다. 대지도 그렇고, 당시 막대한 건설비용도 문제였다. 그러나 시골 작은 마을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났다.

교인들 중에는 환갑 때 들어온 금반지 등을 내놓는 등 특별헌금을 벌였고, 교인들의 이같은 열성적인 기도와 정성에 힘입어 마을에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건축현장에 나와 힘을 모았고, 정성을 더했다.

특히, 멀리 있는 교회 가족들까지 헌금을 하는 등 80년대 초 황청교회건축은 이교회 교인들만의 성전이 아니라 마을주민 모두의 힘과 정성으로 완공될 수 있었다.

1983년 교회의 어려운 상황속에서 새성전을 건축한 황청교회는 믿음의 선진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그 정신을 배우는 동시에 자신의 믿음의 자리를 확인하려는데 목적을 두었다.

'나를 보내 주소서, 하나님 사랑·이웃 사랑'을 교회 표어로 정하고 있는 황청교회 김득수 장로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황청교회 초창기 함께했던 이들의 이름 앞에서면 숙연한 마음으로 가슴이 뜨거워진다"며, 초창기 일제 치하에서의 교회이야기, 한국전쟁 때 소실된 교회 등 역경을 딛고 오늘에 이른 황청교회 역사를 오랜 시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 편안하게 들려 주었다.

또한 김장로 집 거실에는 황청교회 현 성전을 새로 짓고 교회 입구에서의 모습을 담은 사진 1점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색이 바래고 형채도 희미하지만, 김장로는 교회에서 처음으로 찍은 아주 소중한 사진이라며, 개화기 때 어설픈 사진속 본인의 모습을 바라보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평소에 기독교 복지사업에 뜻을 두었던 김 장로는 "넓은 대지에 교회 건물을 지어 많은 성도들이 모이고, 솟구치는 신앙의 열정을 느끼고, 지역과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말했다.

교회를 돌아나오며 교회의 씨앗이 되었던 초대교회 굳건한 믿음의 발자취가 오늘의 교회를 이룩할 수 있었던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다.

숙연한 마음을 가다듬고, 마음속으로 찬송을 부르며 머구미고개를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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