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말녀와 윤동주의 자화상
막말녀와 윤동주의 자화상
  • 오창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12.03.28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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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오창근 <칼럼니스트>

윤동주의 시를 읽다 보면 가냘픈 외모에 피부는 하얗고 팔뚝에는 푸른 실핏줄이 도드라져 보이고 조금은 신경질적으로 생긴 젊은 사내의 모습이 떠오른다.

내면을 파고드는 자문(自問). 번민을 한 짐 짊어지고 고즈넉한 대학 캠퍼스를 산책하는 모습이 오버랩 되는 것 또한 그의 시에서 풍기는 자아성찰적인 모습이 자주 보이는 까닭이다.

우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미워져 돌아서고 그러다가 그리움과 연민에 다시 우물곁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그의 시 자화상을 보면 초극(超克)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젊은 영혼과 마주한다.

얼마 전에는 밥을 사랑하고 절(拜)을 사랑하는 시인을 만났다. 원흥이 방죽에 사는 두꺼비를 만나기 위해 새벽 5시에 드나들기를 일 년 가까이했다는 말과 두꺼비 울음에서 생명의 기운을 느꼈다는 말을 들었다.

자연과 내가 불이(不二)가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고 밥상으로 차려진 것들이 죽음의 형식을 빌려 내 생명에 온기를 더하는 것들임을 알아 밥을 대하매 극진함과 공손함으로 대하게 되었다고 한다.

내 몸의 반은 부모로부터 왔지만, 나머지 반은 다른 생명이 모여 채워진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어찌 내 몸을 함부로 하고 행동거지를 가벼이 할 수 있겠는가? 나를 공경하는 것이 곧 나에게 하는 절이다.

두 손을 바르게 공수(拱手)하고 허리를 굽혀 상대를 높이지만 실상은 내 안에 모시고 사는 생명에 대한 감사의 뜻이라고 했다.

자신의 내면을 깊게 들여다봄으로 자신에게 공경의 도를 다함과 더불어 사람에게 대한 무한한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세상에 깊은 것은 바닷속만이 아니고, 세상에 넓은 것은 우주만이 아니다. 깨달음의 궁극은 항상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데서 출발한다. 한 뼘도 안 되는 가슴 속에 무량한 이치의 고갱이가 자리 잡고 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은 마천루(摩天樓) 또한 건물의 기초를 다루는 목수의 탱탱한 먹줄의 곧음에서 출발한다.

모든 시작은 이렇듯 사람의 마음에서 연유한다. 허한 마음을 두고 바깥 외물에서 답을 찾으려는 노력은 늘 허망하고 실망만 안겨 줄 뿐이다.

고인 물을 두 팔을 이용해 가운데로 모으려 해도 모으려는 속도와 비례에 손가락 사이로 물은 빠져나가지 안으로 쌓이질 않는다. 자신을 돌아보는 것의 시작은 비움에 있다. 물을 밖으로 밀어내면 전과는 반대로 물은 안으로 점점 빠르게 밀려든다.

나를 들여다보지 않고 내 안에 바깥 것을 잔뜩 쌓아 내 것인 양 착각하고 사는 사람이 많다.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은 아랑곳하고 오로지 나라고 하는 이기심만 준동해 그것이 참나인 줄 알고 남을 꾸짖고 세상을 호령하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가끔은 우물에 비친 자신을 가엽게 여기던 윤동주와 밥을 놓고 절을 할 줄 아는 시인의 모습을 떠올린다.

강퍅(剛愎)한 마음에서 나오는 소리는 시퍼런 날이 서 상대를 해하지만 정작 자신의 잘못은 깨닫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상대에게 생채기가 될 수 있는 무례한 언행을 함부로 하게 되어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다.

상대한 대한 배려와 이해 없이 자기 멋대로 행동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막말녀'라는 말이 검색어에 오르고, 잘 살펴 걷지 못해 생긴 의혹과 추문이 선거철만 되면 범람하는 까닭도 마음 조이고 삼가지 못한 병고에서 나온다.

중용에서 강조하는 신독(愼獨)처럼 혼자 있을 때 마치 만인이 보고 있는 것처럼 언행을 단정히 하고 마음을 단속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물 속에 비친 자신을 보며 연민을 느끼고 보듬으려 애썼던 윤동주의 우물은 결국 옆 사람의 눈동자에 비친 나임을 안다면 봄볕은 한 층 푸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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