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사라예보-세계1차대전 도화선의 현장에 가다(1)
<31> 사라예보-세계1차대전 도화선의 현장에 가다(1)
  • 엄갑도 <전 충북중앙도서관장>
  • 승인 2012.02.02 21: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엄갑도의 발로쓰는 발칸반도 여행기
사라예보 가는 길-웅장한 바위산과 푸른 네레트바 강물

민족간 최대 비극의 역사는 단 두발의 총성으로부터…

엄갑도 <전 충북중앙도서관장>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 암살로 세계대전 발발
시내 중심가 빌딩 벽 등 수많은 총탄 자국 선명
한국 여자탁구 사상 첫 구기종목 우승 이룬 곳

푸르게 굽이치는 강물 따라 웅장하고 신묘한 기형기산의 회백색의 바위산과 간간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하는 아름다운 집들의 풍광, 가끔씩 송어 양식장도 보이고, 몇 개의 터널을 지나면서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서 가는 고혹적인 산하의 정경에 나도 모르게 탄성이 절로 나오고 있었다. 통돼지 익히기에 여념이 없는 풍광 좋은 곳에 자리한 휴게소에도 들러 잠시 쉬고서 다시 달려온 우리들은 오후 4시경 사라예보에 도착했다. 2시간 반이 소요된 여정은 아름다운 풍광의 연속이었다.

사라예보 초입에서 현지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면서 사라예보 관광길에 올랐다. 도로 중앙에 전차가 달리고 자동차들이 달리는 6차선 도로는 생각보다 밝고 깨끗했다. 시 중심가 대로변 양쪽에 있는 빌딩과 아파트 벽에는 수많은 총탄 자국이 선명하게 보이기도 했다. 보스니아 내전의 아픔과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듯 느껴지게 했다. 노란색 건물의 홀리데이, 국립우체국, 국회의사당, 구시청사 등을 보면서 메인 스트리트를 달리던 버스는 도심을 흐르는 강변에서 멈추고 우리는 걸어서 어떤 돌다리위에 섰다.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부부가 1914년 6월 28일에 암살된 역사의 현장, 라틴 다리라 한다. 라틴 다리 아래론 밀랴츠카강의 맑은 강물이 비극의 100년 전 세월을 잊은 듯 유유자적 흐르고 있었다. 강이래야 우리나라 청계천 보다 조금 넓은 수준의 시냇물이었다.

현지 가이드의 설명은 계속되고 있었다. 당시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아내 소피아를 대동하고 군사훈련을 참관하기 위해 사라예보를 방문할 것이란 소식이 들렸다. 남슬라브 민족통일을 부르짖던 세르비아 청년비밀 결사 '검은 손'의 테러조직에 속해 있던 청년들이 음모를 했다고 한다. 일차적으로 '검은 손'의 행동대원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이들 부부를 향해 폭탄을 던졌으나 황태자는 폭탄을 주워 밖으로 던져 위기를 모면했다고 한다. 황태자 부부는 이날 밤 이일로 부상당한 수행원들을 찾아 문병을 가던 중 병원으로 가자는 황태자의 말을 잘못 알아들은 기사가 호텔로 향하는 라틴 다리 앞을 지나는 바람에 2차 저격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라틴 다리 초입의 카페에서 저격 실패에 따른 대책을 논의하던 '검은 손' 단원 중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때 마침 그들 앞을 통과하던 황태자의 차를 발견하고 뛰쳐나와 바로 이 다리 부근에서 총으로 이들 부부를 저격했던 것이라고 한다.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사형은 면했다. 그러나 1918년 봄 결핵으로 감옥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여기서 남슬라브 민족통일이라는 것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세르비아와 합쳐지기를 바라는 민족운동이었다.

이 사건 이후 1914년 7월 23일 오스트리아는 배후에 세르비아가 관련되었다고 하여 과대한 요구의 최후통첩을 세르비아에 보냈다. 세르비아의 거부로 협상은 결렬되어 사라예보 사건이 일어 난지 한 달 째 되는 7월 28일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였고, 각 이해 당사국들이 전쟁에 참여함으로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이렇게 사라예보 사건으로 일어났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19세기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각 나라마다 민족주의 대두, 군사력 증대, 식민지 경쟁, 군사동맹체재 등이 싹텄기 때문 이었다고 한다. 전쟁이 시작되자 프랑스, 러시아, 영국은 세르비아를 지원해 연합국을 형성했고, 이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독일로 구성된 동맹국이 대항했다. 다른 국가들도 잇달아 연합국이나 동맹국에 가담했다고 한다.

금지까지 나는 좀 부끄러운 얘기지만, 보스니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암살되었는데, 그 사건이 왜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는지 구체적인 내용은 잘 몰랐다. 이번 사라예보 방문에서, 아니 그 역사 현장에서 확실하게 알게 되었으니 역사 공부는 제대로 한 셈이다.

우리는 다시 라틴 다리를 걸어 나와 바로 건너편에 있는 사라예보사건 기념박물관 앞에 섰다. 이 박물관은 당시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저격 직전 몸을 숨기고 있던 카페였다고 한다. 보스니아 정부는 이 자리에 사라예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사라예보 박물관을 세우고자 했다. 그래서 정부가 카페를 수용하면서 높은 보상가를 제시했으나 카페 주인은 거절하면서 현재의 카페를 원형 그대로 이전 해줄 것을 요구하였다고 한다. 부득이 정부는 이 자리에 있던 카페를 그리 멀지 않는 강변 쪽에 이전 시켜 주고 박물관을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이전해 간 카페의 이름은 '용기 있는 자의 집'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시민들이 붙여준 이름이라고 한다. 이리하여 이 카페도 지금은 명물이 되었다고 한다.

박물관 외벽에는 범인인 세르비아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사진, 재판 받는 법정 광경 사진 등 사건 전후의 사진과 경과를 설명하는 게시판도 있었고, 건물 왼쪽 모퉁이 벽면 하단에는 이곳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공과 그의 아내 소피아가 암살되었다는 표지판이 있었다.

이젠 역사 속의 인물들로 묻혀 버린 그날의 얼굴들이 슬픔 가득 담아 거기 있었다. 민족이 무엇이 길래 두발의 총성으로 1000만명 군인이 죽고, 2100만명의 부상자를 내고, 수많은 건물 파괴에다 세계의 정치 사회 경제에 대변혁을 가져온 세계 대전을 일으킬 수 있었단 말인가.

   
시내 중심가 거리, 총탄 자국을 때운 흔적이 보이는 건물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암살된 라틴 다리
   
   
라틴 다리 건너편에 있는 사라예보 사건 기념박물관
   
   
1914년 사라예보 저격사건 범인들의 재판광경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