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엄청난 희생을 치른 비극의 모스타르
<30> 엄청난 희생을 치른 비극의 모스타르
  • 엄갑도 <전 충북중앙도서관장>
  • 승인 2012.01.26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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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갑도의 발로쓰는 발칸반도 여행기
모스타르의 상징, 아치형의 스타리 모스트 다리

내전의 상처까지 고스란히 간직한 천년의 아름다움

엄갑도 <전 충북중앙도서관장>


인종·종교 등 서로 다른 이웃 이어주는 스타리 모스트 다리 눈길
1993년 크로아티아계의 장악에 보스니아계 반발로 내전 발발
내전으로 붕괴 2004년 복원… 민족간 화해의 상징물로 알려져

은혜로운 이곳 메주고리예에 좀 더 머물면서 복되신 성모님의 은총을 받고 싶은 마음이야 간절했지만 아쉬움을 남기고 약속된 시간에 모인 우리는 보스니아 내전으로 엄청난 희생을 치른 비극의 모스타르를 향해 출발했다.

메주고리예에서 모스타르로 가는 길은 그리 멀지는 않았으나 산악 길이었다. 천 길 낭떠러지 절벽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 지나는 계곡 길, 곧 자그마한 도시가 우리들 눈앞에 나타났다. 해발 600m의 커다란 분지에 위치하여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강가의 작고 오래된 건물들이 아름답고 평화스러워 보였다. 내전의 상처가 깊은 모스타르라 한다.

이 모스타르는 옛날 헤르체고비나의 수도였다고도 한다.

시가지 도로변에서 버스는 멈추고, 버스에서 내린 우리들을 맞이한 것은 폭격으로 잔해만 남은 건물, 그리고 수많은 총탄 자국이 선명한 건물들이었다. 짙은 우수를 느끼면서 우리는 가이드를 따라 시가지 골목길을 걸어 나왔다. 좁은 골목길은 울퉁불퉁한 조약돌이 박힌 돌길이었다. 시내 주변 상가들을 구경하면서 10여분 쯤 걸어 왔을 때, 시내와는 전연 다른 모습의 오래된 마을이 나타났다. 천년이나 되었다는 올드 시티라 한다. 많은 관광객들이 서성거리고 낮은 돌담 벽 밑으로 맑고 푸른 강이 흐르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강 위쪽을 보니 아치형의 아름다운 하얀 돌다리가 거기 있었다. 이름하여 그 유명한 스타리 모스트라 한다. 이 다리는 네레트바(Neretva)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북쪽에는 가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인들이 살고 있는 마을과 남쪽에는 이슬람을 믿는 보스니아인들이 살고 있는 마을을 연결해 주는 다리라고 한다. 원래 이 다리는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받던 시절인 1566년에 오스만투르크의 한 건축가에 의해 1,088개의 횐돌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러니까 약 4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모스타르의 상징적인 다리였다.

이 다리를 중심으로 양쪽 마을은 수 백 년 동안 종교와 문화를 달리하면서도 서로를 인정하면서 이웃으로 정답게 살아왔다고 한다. 1992년 보스니아가 독립하는 과정에서도 힘을 합쳐 세르비아와 싸웠다고 한다. 그러나 곧 크로아티아계는 무장을 통해 모스타르와 인근 지역을 장악하고 이웃하고 있는 크로아티아 공화국과의 병합을 추진해 나갔다. 이러한 크로아티아계의 모스타르 장악에 보스니아 이슬람계는 강력히 반발하게 되었다.

마침내 1993년 봄 양측 간에 군사적 충돌이 일어나면서 끔직한 전쟁터가 되고 말았다. 곧 다리를 사이에 두고 크로아티아계와 보스니아계가 적이 되어 서로 죽이고 죽이는 전투를 전개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피비린내 나는 치열한 전쟁으로 도시 인구의 절반에 이르는 많은 사상자를 내게 되었다고 한다. 군데군데 예쁘게 꾸며진 공동묘지에는 태어난 해는 다르나 1993년에 같이 목숨을 잃은 이들의 묘지가 가득했다. 까만색의 비석이 가톨릭 묘지였고, 흰색의 비석이 이슬람 묘지였다. 그만큼 처참했던 당시 상황을 그대로 전해주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파왔다.

그런 전쟁의 와중에 크로아티아계가 보급로가 된 저 다리를 정밀 폭파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무너진 다리는 1997년 나토평화유지군이 유네스코의 지원하에 네레트바강에서 다리의 부서진 조각돌들을 찾아내어 2004년에 다시 복원 했다고 한다. 그리고 200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 되었다고 한다. 내전이 끝난 후 다시 서로의 종교와 문화를 인정하면서 도시가 안정을 되찾고, 다리가 복원되면서 서로 죽이고 죽이는 과정에서 남은 앙금을 씻어내고 서로 화합함으로서 전 세계적으로 민족간의 화해를 상징하는 다리로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들은 천천히 다리 쪽으로 걸어갔다. 조약돌로 포장된 좁은 길가엔 돌 지붕 전통 가옥들에서 기념품 가게를 만들어 놓고 기념품들을 팔고 있었다. 귀걸이 목걸이 수공예품 등 각종 잡화물들을 팔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지난날의 처참했던 상처들이 아물지 못한 듯 했다. 하나같이 모두가 웃음을 잃은 얼굴 표정들이었다. 더욱 애처러워 보였던 것은 한쪽 다리를 잃은 남자가 헙수룩한 옷차림으로 강가 낮은 돌담 위에 올라 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다리를 응시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마도 죽어간 가족과 친구들의 생각에 잠긴 슬픔 같아 보였다. 또 다리를 건 늘 무렵에는 다리 난간에 앉아 두 손 모아 기도드리고 있는 백발의 할아버지 모습은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거기에다 다리 건너기전에 있는 박물관에는 여러 가지 상처 입은 사진들을 전시해 놓고, 영상으로 다리 폭파의 그날의 장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스타리 모스트 끝부분에 세워놓은 'DON'T FORGET 93(잊지말자 93년의 아픔을)'이란 글귀가 적힌 기념석은 스타리 모스트를 건너는 모든 관광객의 가슴을 애잔하게 만들었다.

다리를 건너간 쪽 마을에도 기념품 가게가 늘어서 있었다. 집들은 군데군데 내전의 상처로 남아 있는 총탄 흔적을 여기저기 보여주고 있으면서 말이다. 다시 다리 한 가운데로 와서 다리 밑을 바라보았다. 20m 높이의 이 다리에서 여름이면 다이빙 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얼마나 평화로운 광경인가. 그러나 오늘 내가 바라보고 있는 저 푸른 강물은 조용히 흘러가지 않고 있었다. 짙푸른 모습으로 흘러가는 강물은 몸부림치면서 소리 내며 흘러가고 있었다. 지난 역사의 상처를 알기에 저리도 요동치며 흐느껴 흐르는 것일까. 세월이 흘러도 이 모스타르는 우리들 가슴에 애잔한 도시로 추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우리는 전통 가옥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고, 시내 중심지 도로변 까지 걸어오면서 이곳저곳 시가지 구경을 천천히 했다.먼 산 정상에 서 있는 하얀색 십자가, 푸른빛의 네레트바강, 우뚝우뚝 솟은 모스크, 성당의 첨탑들, 고색찬연한 전통가옥들, 아치형의 하얀 돌다리, 조약돌 골목길, 거기다 쏟아 내리는 눈부신 햇살 까지. 이 모두가 너무나 아름다운 모스타르였다. 언제 전쟁이 있었냐는 듯 너무나도 평화스러웠다. 그러나 모스타르는 불과 20년도 채 되지 않는 세월 속에 전쟁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었다. 당시의 절규가 들려오는 듯 했다. 왠지 모를 음울한 분위기에 뒤덮여 있는 듯했다. 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마을에 진심으로 양쪽간의 화합이 이어져 다시는 쓰라린 슬픔의 역사가 되풀이 되는 일이 없기를 간망했다.

 

   
총탄 자국이 선명한 가옥
   
   
기도 드리고 있는 백발의 할아버지
   
   
스타리 모스트 다리 위에서 현지인들과 함께
   
   
 
  1993년 내전시 죽은 이들의 공동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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