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피로 얼룩진 수 많은 아픔 간직한 슬픔의 땅
<28> 피로 얼룩진 수 많은 아픔 간직한 슬픔의 땅
  • 엄갑도 <전 충북중앙도서관장>
  • 승인 2012.01.05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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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갑도의 발로쓰는 발칸반도 여행기

엄갑도 <전 충북중앙도서관장>

남한의 절반 규모·인구 386만명·수도 사라예보·1인당 국민소득 6035달러

다민족 국가적 성격 … 1국가 2체제 … 3인 공동대통령제 … 정치 상황 불안정

내전으로 극심하게 파괴되었다던 드브로부니크, 1999년부터 유네스코의 지원으로 복원작업을 시작하여 성채 왕궁 수도원 교회 등 역사적 기념물 가운데 크게 손상된 건물들을 5년간 복원하여 옛 명성을 되찾게 되었다는 이 이름다운 해안 도시 드브로부니크를 감명 깊게 살펴본 우리는 오후 4시 30분경 이곳을 출발했다.

다음 행선지는 성모 마리아님의 발현지인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메주고리예이다. 약 1시간이 지난 5시 30분경 국경검문소에 도착했다. 출입국 수속을 끝내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로 들어섰다. 아름다운 아드리아해의 절경을 구경하면서 내움을 거쳐 다시 국경검문소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출국, 그리고 크로아티아 입국, 그 후 1시간 정도 내륙으로 들어가면 크로아티아 출국에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입국이라는 복잡한 절차를 또 거쳐야 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로 들어서자 가이드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란 어떤 나라인가에 대하여 다시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보스니아하면 사라예보가 생각나기 때문에 그렇게 생소한 나라는 아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북부 보스니아 지방과 남부 헤르체고비나 지방 이름의 합성어다. 남부유럽 발칸반도 서부에 있는 나라로 동쪽으로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와 경계를 이루며, 북쪽·서쪽·남쪽 등 3면을 크로아티아가 둘러싸고 있다.



헤르체고비나는 좁은 회랑을 통해 아드리아 해의 네레트바 해협에 있는 네움에서 바다와 맞닿아 있으며, 이 회랑이 크로아티아 달마치야 해안 가운데 드브로부니크 북서쪽 약 40km 가량의 지역을 크로아티아 본토로부터 갈라놓았다. 면적 51,209 ㎢로 우리 남한의 절반 정도의 작은 나라이며, 인구는 3,860,000명(2009년 추계)정도, 수도는 사라예보이다. 국민은 이슬람을 믿는 보스니아인이 44%, 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인이 31%, 가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인이 17%, 기타 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이다. 이러한 종교적 분포는 이 나라가 독립하는 과정에서 1992년 4월부터 1995년 12월까지 3년 반 이상 계속된 보스니아 내전의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역사를 간략히 간추려 본다면 6세기 후반부터 슬라브족이 정착하기 시작하였고 960년경에 크로아티아 왕국으로 흡수되고 1018년부터 1462년까지 동로마 비잔틴의 지배를 받다가 1463년부터 1878년까지 415년간을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때 오스만 제국이 헤르체고비나를 보스니아에 통합시킴으로써 지금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만들어진 것이다. 오스만의 지배가 400년 이상 지속되는 동안 많은 보스니아인이 이슬람교로 개종하거나 이슬람 문화에 동화되었다. 오스만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하자 이 땅은 1878년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는다.

이 기간에 1914년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부부가 암살되어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다. 1920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유고 연합국에 속해지며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티토가 주도한 유고슬라비아 인민공화국의 6개 공화국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다가 티토 사후 민주화의 바람을 타고 1991년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그리고 마케도니아가 독립하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도 영향을 받아 1992년 3월 유고 연방에서 세르비아계의 완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분리 독립을 선언한다.

1992년 4월 EU가 분리 독립을 승인하자 신유고의 주축인 세르비아가 독립을 반대하면서 민족간의 처참한 내전이 시작된다. 세르비아군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인 사라예보를 침공하여 이슬람을 믿는 보스니아인과 크로아티아인들을 무차별 학살하면서 내전이 시작 되었다. 당시 유고연방의 밀로세비치 대통령은 보스니아 인종청소를 단행한다. 스레브레니차 집단학살이 대표적이다. 보스니아 내전 중 일어난 스레브레니차 집단학살이란 1995년 7월에 보스니아의 사라예보 동북부에 위치한 스레브레니차의 이슬람교를 제거하기 위하여 보스니아에 주둔하던 세르비아군에 의해 약 8500여명의 사망자를 낸 무차별 학살사건을 말한다.

1992년 '인종 청소'라는 만행을 저지르자 나토와 유엔은 보스니아 내전에 개입하게 된다. 3만 여명의 평화유지군이 보스니아에 파견되었으나 평화유지군의 역할은 미미하기만 하였다. 내전은 휴전과 재 확전이 반복되는 악순환을 되풀이하였다. 그러다가 미국의 주도하에 보스니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등 내전 당사국들과 미국, EU, 러시아 등 중재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1995년 11월 1일 미국의 데이턴에서 평화협상이 개최되었다. 난항을 거듭하던 평화협정은 1995년 12월 데이턴 평화협정에 공식 조인함으로서 마침내 보스니아에 평화가 정착되는 시금석을 마련하였다. 이로써 20만 명 이상의 희생자를 내고 100만 명 이상의 난민을 발생시킨 참혹한 보스니아 내전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협정에 따라 이슬람-크로아티아 연방과 스르프스카 공화국이 국가연합의 형태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아 공화국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다민족 국가적 성격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정치 형태를 특이한 체제로 운영하게 만들었다. 1국가 2체제 형식으로 정치체제가 매우 복잡한 편이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이루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이슬람계-크로아티아계 연방)과 스르프스카 공화국(세르비아계 공화국)은 각각 입법부와 대통령을 가지고 있다. 중앙정부 의회는 양원제로서 하원 의석의 2/3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이, 1/3은 스르프스카 공화국이 구성하며, 상원은 3개 민족이 각각 5석씩 배분하고 있다. 그리고 대통령은 보스니아의 이슬람계 ·세르비아계·크로아티아계 각각 1명씩으로 채워지는 3인 공동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다.(위키 백과, 브리태니크 참조) 아직도 민족간 갈등이 봉합되지 않아 정치 상황이 불안정하다고 한다.

경제도 내란으로 농지가 황폐화되고 이농현상이 발생하고 산업시설도 많이 파괴되어 극심한 고난을 겪었으나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과도선상에서 꾸준히 성장하여 1인당 국민소득이 6035$(2010년기준) 수준으로 성장하였으나 아직도 가난한 나라이다.

오후 7시가 훨씬 지나서야 오늘 우리의 숙소인 카플리나에 도착했다. 카플리나는 성지순례 메주고리예 가는 중간지점에 발달한 조그마한 도시로서 주변에 포도농사를 많아 짓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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