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내전의 상처 씻고 부상하는 크로아티아
<26> 내전의 상처 씻고 부상하는 크로아티아
  • 엄갑도 <전 충북중앙도서관장>
  • 승인 2011.12.15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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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갑도의 발로쓰는 발칸반도 여행기
휴양도시 아드리아 해에 떠 있는 요트들
오랜 분쟁 딛고 일어서는 유럽 속의 유럽

엄갑도 <전 충북중앙도서관장>

한반도 1/4·인구 445만명
2차 세계대전후 공업국 변모

독창적 문화·예술가치 창조
전세계 관광객 발길 이어져

크리아티아 전도

색창연한 해안도시 코토르 관광을 끝내고, 오전 10시 30분경 크로아티아의 드브로부니크를 향해 출발헸다. 코토르를 출발한 우리는 해안도로변 절경을 구경하면서 20여분 달려왔을 때, 페라스트라는 마을을 지나치게 되었다. 그때 가이드는 앞바다를 보라고 소리쳤다. 페라스트 앞바다에 그림같이 떠 있는 두 개의 작은 섬을 볼 수 있었다. 어떻게나 아름다운지 우리 모두 감탄사를 연발했다. 왼쪽 섬은 자연섬이고, 오른쪽 섬은 인공섬이라고 한다.

자연섬은 성 조지섬이라고 하는데 한때 페라스트를 점령했던 프랑스 군인이 포격 중 사랑하는 여인이 죽자 죽을 때까지 수도사로 살았다는 섬이고, 인공섬은 17세기에 가톨릭 성당이 세워져 있는 반석 위의 성모섬이라고 하는데, 그 섬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550년 동안 해마다 7월 남자들만 배를 타고 노를 저어 들어가 돌을 떨어뜨려 만든 섬이라고 한다. 1630년에 바로크 양식의 성당을 세우고 1722년에 증축하였다고 한다.

해안도로를 계속 달리는 버스 차창으로 들어오는 에메랄드빛의 푸른 아드리아 해와 둘러싸고 있는 묘봉기산들의 풍광들이 어떻게나 아름다운지 눈을 떼어 놓을 수가 없었다. 이 아름다운 풍광들을 즐기면서 오는 사이에 11시 30분경 국경 검문소에 도착했다. 출입국 수속을 모두 끝내고 크로아티아 땅으로 들어섰을 때는 12시 20분경이었다.

국경을 넘어서자 가이드는 크로아티아란 어떤 나라인가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고 있었다. 크로아티아는 발칸반도 중서부에 있는 나라로 북서쪽으로는 슬로베니아, 북쪽으로는 헝가리, 동쪽으로는 세르비아(보이보디나 자치구), 남쪽으로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국경을 이루며, 서쪽으로는 아드리아 해에 면해 있는데 아드리아 해를 따라 몬테네그로까지 펼쳐지면서 전체적으로 초승달 모양을 이루고 있다. 수도는 자그레브이다.

옛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이루던 공화국이었으나, 1980년대 말 소련과 동유럽을 휩쓴 개혁의 흐름 속에 1991년 6월 25일 독립을 선언했다. 면적 5만6,594㎢로 한반도의 4분의1 정도이며 인구는 약 445만명 정도로 작은 나라이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생소하고 멀게만 느껴지는 나라다. 인종은 크로아티아인 78.1%, 세르비아인 12.1%, 헝가리인 0.5%, 슬로베니아인 0.5%, 기타 7.9%로 구성된다. 종교는 크로아티아인들 사이에서는 로마 가톨릭교가 지배적이지만 세르비아인들은 세르비아 정교회를 믿는다.

크로아티아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본다면, 크로아티아인들이 이 지역에 들어온 것은 7세기였다. 북부 달마치야에서 판노니아까지 진출했던 크로아티아의 부족들은 느슨한 동맹을 이루고 있다가 803년에 샤를마뉴의 종주권을 인정했으며, 곧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그 후 크로아티아인들의 로마 가톨릭교에 대한 충성심은 정교회를 믿는 이웃 세르비아와의 관계에 계속 영향을 끼쳐 왔다.

10세기에 크로아티아 왕국이 수립되었고 1091년에 헝가리의 라슬로 1세가 왕국의 통치권을 장악하면서 크로아티아는 8세기 동안 헝가리에 합병되어 있었다. 헝가리와의 합병 기간에도 크로아티아는 자체의 의회인 사보르를 유지했으며, 법률상으로는 독립 왕국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1526년 헝가리가 모하치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에 패배하면서 크로아티아의 대부분 지역이 투르크로 넘어가 1699년까지 그들의 통치를 받았다.

1918년까지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일원이 되기도 했으며,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패배한 후 크로아티아는 다른 남슬라브족 영토와 함께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1929년에 유고슬라비아로 개칭)을 이루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유고슬라비아가 추축국들에게 점령·분할 당하자 1941년 4월 10일 자그레브에서 크로아티아가 독립국가임을 선포했고, 4일 후에 독일과 이탈리아의 승인을 받았다. 새 국가는 파시스트 테러 조직인 우스타샤의 우두머리 안테 파벨리치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그는 극도로 잔인하고 폭력적인 독재정치를 펼쳤다. 파벨리치는 소위 '인종정화'를 내세워 수십만의 세르비아인, 유대인, 집시, 반파시스트 크로아티아인들을 학살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공산세력이 이끄는 파르티잔(유격대원)들이 통치권을 확보한 지역에서는 민족해방평의회를 결성했다. 1945년 파르티잔들이 자그레브를 점령한 후 이 평의회는 인민정부로 전환되었고, 크로아티아는 인민공화국으로서 유고슬라비아에 합병되었다.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크로아티아는 처음에는 유례없는 발전을 이룩했지만 연방 내에서 자치권을 더 많이 확보하려는 노력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사회주의가 붕괴하자 선거를 통해 비공산주의계 정부가 탄생했으며 1991년 6월 25일 독립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에 자극을 받은 크로아티아 내의 세르비아인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한때 이 반란군은 세르비아가 이끄는 유고슬라비아군의 도움으로 크로아티아 내의 여러 지역을 점령했다. 그러나 UN은 내전 악화 방지를 위해 휴전을 중재했고, 휴전과 교전을 반복하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1995년에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 이와 같이 최근까지 내전이 있었던 복잡한 나라지만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을 잘 유지하면서 전통적인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독창적인 문화와 예술의 가치를 창조해 온 나라로 인정받아 많은 관광객이 다녀가고 있다고 한다.(브리태니크 참조)

크로아티아의 경제는 농업과 가축사육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후 공업이 급속히 발전하면서 전통적인 농업국가에서 공업국으로 변해갔다. 해운업과 관광업(특히 달마치야에서)도 발달했으며, 천연자원(석유·석탄·보크사이트)을 기반으로 한 공업개발에 많은 관심이 주어졌다. 주요 산업으로 식품가공·포도주·섬유·화학·석유·천연가스 산업 등이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이 1만1,576$(2009년기준)로 발칸반도 나라들 중에서는 비교적 잘사는 나라였다. 내전의 상처를 씻고 힘차게 부상하는 나라 중의 하나였다.

 

페라스트 앞바다에 떠 있는 두 개의 아름다운 섬
아드리아 해안의 휴양도시
크로아티아 국경검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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