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 大母' 박병선 박사와 청주
'직지 大母' 박병선 박사와 청주
  • 한인섭 사회부장
  • 승인 2011.11.23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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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23일 타계한 박병선 박사는 인류 최고의 발명품으로 꼽히는 금속활자의 역사를 바꿔 놓았다. 독일 구텐베르크에 가렸던 세계 최고 금속활자 종주국이 한국이라는 점을 세계에 각인시켜 ‘직지심체요절’의 위상을 제자리에 올려 놓은 것이다. 서구 위주의 문명 흐름을 바꿔 놓은 사건이기도 했다.

청주는 직지를 인쇄한 고장이라는 점에서 박병선 박사의 타계는 애도의 깊이를 더한다. 1011년 2월 15일(음력) 거란의 침략으로 몽진에 나섰던 고려 현종이 청주 행궁에서 고려 인쇄 문화의 효시라 할 수 있는 목판 초조대장경 발원과 판각, 금속활자 직지 주조(1377년)까지 1000년 청주 역사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한 거물이기 때문이다.

1985년 운천지구 택지개발사업 과정에서 발굴된 청동 금구(쇠북)에 새겨진‘서원부 흥덕사(興德寺)’라는 내용과 박병선 박사가 파리국립도서관에서 발굴한 직지 인쇄본(하권)에 적힌 ‘1377년 청주 외곽 흥덕사 인쇄’라는 내용이 조합을 이뤄 청주는 인쇄문화의 메카라는 명성과 함께 세계적 도시로 등장할 수 있었다.

택지개발 과정에서 밝혀진 ‘흥덕사 금구’와 달리 박병선 박사의 인쇄본 발굴은 애국심과 학자적 열정의 결합체였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부여할 수있다.

박 박사는 1950년 서울대 사범대 사학과를 졸업한 후 프랑스 유학에 앞서 은사였던 이병도 선생으로부터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이 약탈해 간 물품의 행방을 찾아야 한다”는 당부의 말을 들었다고 한다.

광복 이후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이었던 박 박사는 소르본 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하며 파리국립도서관을 문이 닳도록 드나든 결과로 특별연구원 채용 기회와 직지 인쇄본 발굴이라는 크나큰 업적을 남겼다.

1967년 박 박사가 파리국립도서관 한국 서적 코너에 있던 직지 해제 과정에서 마지막장에 쓰여진 간행기록은 인류 금속활자 문명의 흐름을 바꿨다. 서구나 동양할 것 없이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세계 최초라는 점이 정설이었던 상황에서 직지가 78년 앞서 인쇄된 금속활자라는 사실은 누구에게도 인정 받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중국과 일본, 한국의 인쇄술을 연구하고, 직접 납활자를 만드는 과정을 거쳐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라는 점을 입증해 낸 인물이었다.

1972년 프랑스 국립도서관 주최 ‘BOOKS’ 전시회와 동양학 학자대회에서 금속활자 직지를 발표해 학계의 인정을 받게 된다. 박 박사의 발표 내용은 세계 서지학계에는 충격을 안겼고, 국내에는 서지학 연구의 기폭제가 됐다.

청주 흥덕사지 발굴 이후 고인쇄박물관 개관과 직지 원본(인쇄본) 찾기 운동은 벽장이나 창고 한 켠에 먼지 속에 묻혀 있던 옛 서적과 족보까지 그 의미와 가치를 다시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했다.

청주는 직지와 금속활자를 지역의 문화유산이라는 가치와 지역적 자긍심을 안겼다. 직지를 활용한 도시마케팅을 도입해 청주는 그야말로 ‘직지의 도시’가 됐다. 외규장각 도서 반환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그녀의 공로는 말 그대로 기념비적이다.

청주고인쇄박물관 한 켠에는 이미 ‘박병선실’이 설치·운영되고 있다. 정부가 은관문화훈장을 전달했던 1999년 청주시는 그녀에게 명예시민증도 전달했다. 해마다 박 박사를 초청하는 등 예우는 하고 있다. 장례식이 끝나면 정부가 박병선 박사의 업적과 뜻을 기리는 기념사업 방안을 찾을 것이다. 정부와 별개로 청주시도 다양한 사업 방안을 찾아야 할 것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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