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영덕의 실크로드 견문록 < 24 >
함영덕의 실크로드 견문록 < 24 >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06.14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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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道茶를 음미하는 바이족 삶에 빠져들다
▲숭성사삼탑(崇聖寺三塔)인데 흔히 삼탑사(三塔寺)라 불린다. 높이 70m의 16층 탑 하나와 높이 40m의 10층 탑 두개로 이루어진 삼탑사는 시내 어느 곳에서도 하얀 탑신이 눈에 띈다. 날씨가 좋은 날은 남쪽에 있는 삼탑도영공원의 작은 호수에 탑의 모습이 비추어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한다. 도시를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는 창산은 얼하이호수와 함께 대리를 더욱 아름답고 매력적인 도시로 만들어준다. ⓒ함영덕

경각을 출발하여 금릉도(金陵島)로 향했다. 일명 해도(海島)라고도 부르는 금릉도 선착장엔 유람선이 10여척 정박해 있고 관광객과 섬 주민들이 모여들었다. 배 한척을 빌렸다(90元). 섬과 호수주변 마을 사이로 유람선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바이족 섬마을에 조상들을 모신 조그만 삼성묘(三星廟)와 노인정을 둘러보았다. 섬마을 소녀들 한 떼가 따라 다니며 마을 이곳저곳을 안내해 주었다. 13살 해맑은 소녀들의 눈동자와 친절함에 이끌려 바이족 특산물인 삼도차(三道茶)를 마셨다.

삼도차의 첫 잔은 쓴맛이 배어 나온다. 두 번째 차를 마시니 단맛이 났다. 세 번째 차는 수정과 같은 맛을 내었다. 두 번째 차보다는 단맛이 덜하지만 무언가 생각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한잔에 5元, 1인당 15元으로 비싼 찻 값이었지만, 호기심 많은 초롱초롱한 바이족 소녀의 눈망울을 보니 저절로 기분이 상쾌해졌다. 호수 안에 떠 있는 섬 마을 해도에서 차 향기를 가슴에 가득 담고 발길을 돌렸다. 시원한 호수바람이 깃발을 흔들고 있다. 잔물결 너머 따리 시내의 모습이 안갯속에 아스라이 잠겨 있다. 돛단배 띄우고 고기 잡는 모습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되살리게 하는 그런 향수 짙은 정취다. 유람선을 제외하고는 어부들이 노를 저어가며 대부분 통발로 고기잡이를 하고 있다.

오후 1시쯤에 선착장으로 되돌아 왔다. 마차로 30여분 달려 싼타스(三塔寺)로 향했다. 하얀 탑신이 하늘을 밀어 올리듯 층층이 탑을 쌓아올린 웅장하고 경쾌한 자태다. 싼타스 입구 길 양쪽엔 가로등이 도열해 있고 노란 빛깔의 관상수 잎들이 무리지어 피어 있다. 청동 해태 조각상을 지나 입구로 들어서면 높은 탑신(塔身)이 장엄하게 솟아있다.

싼타스 주변은 대리석의 고장답게 광장이 대리석으로 조성되어 있다. 대리석으로 만든 계단과 광장은 단단하고 기품 있는 운치를 풍기고 있다. 충썽쓰산타(崇聖寺三塔)는 3개의 탑중에 중앙의 제일 높은 천심탑(天尋塔)이 높이 69m에 16층이며, 시안의 소안탑과 비슷한 양식으로 지어졌다. 층마다 감실이 있고 그 안에 대리석으로 조각한 불상이 있다고 하나 현재는 탑의 입구를 막아놓아 볼 수가 없다. 천심탑 좌우에 작은 탑이 2개 있는데 높이 42m의 8각 10층이다. 삼층석탑의 웅장한 규모나 탑을 쌓은 모양이 독특하여 대리국의 독자적인 문화와 역사의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다. 삼탑을 지나면 커다란 3층 누각이 나타난다.

누각에 올라서면 3층탑의 뒷면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탑 주변의 옛날 고옥(古屋)과 담 너머 작은 연못 주변으로 이어지는 대리국 주택들을 감상할 수 있다. 앞쪽 산기슭에 자리 잡은 우동관음전(雨銅觀音殿) 주변 대리석 도로 옆으로 잔디와 조경수들이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 있다. 누각에서 내려와 길고 둥그런 곡선을 띤 작은 연못으로 다가가니 3탑의 그림자가 연못 속에 비추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매끄럽고 유연한 곡선미를 살려 3탑의 그림자를 담고자하는 예술적인 혜안이 매우 돋보였다.

따리시의 서북쪽에 위치한 3탑은 따리의 상징이다. 사찰은 전란으로 사라졌지만 탑만이 남아 따리의 유구한 역사와 예술적 안목을 보여주고 있다. 따리는 해발 1976m의 서부 윈난의 중부에 위치하고 있는데 윈난 문화의 발상지며 바이족(白族)의 고향이다. 그들은 따리를 중심으로 음력 3월 15일 3월가(三月街)와 음력 6월 25일 화파절(火把節)에 각기 독특한 축제를 벌이는데 소수민족 축제를 보려고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는 시기다.

오후 4시 씨아관(下關)에서 리지앙으로 출발했다. 따리에서 리지앙까지는 열차가 없다. 깜박 졸다 깨어보니 아직도 바이족 자치구 들녘을 지나고 있다. 산길을 따라 보이는 밭들은 새빨간 황토 흙으로 덮여 있으며 대부분은 초원으로 작은 풀들이 자라고 있다. 산 정상조차도 붉은 흙으로 덮여 있다. 1시간 20여분 달리면 산간 고원마을 집단 촌락이 나타나고 적벽돌 토담과 바위를 제외하곤 모든 것이 황토 흙으로 덮여 있다. 산정을 달리며 고원 아래 아스라이 펼쳐지는 마을을 굽어보는 것도 또 다른 맛이다.

버스가 서서히 고원 아래로 내려가고 있다. 2차로 아스팔트길이 거대한 산중턱을 뚫고 달리면 마치 허공에 떠서 산 아래 마을을 내려다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1시간 30분 만에 처음으로 주유소를 만났다. 고도가 낮아짐에 따라 소들이 들판에 보이기 시작하며 소나무 숲이 나타났다. 처음으로 많은 소나무 군락지를 본다. 송이 시장도 있어 한국의 중부지방과 비슷한 기후와 풍토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3시간 만에 리지앙에 도착했다.

고성국제청년여관(古城國際靑年旅館)에 방을 구했다. 1인당 20∼120元까지 가격의 차이가 있으며, 배낭족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20元짜리 방을 구했다. 나시족 전통가옥을 개조해서 방 한 칸에 3단으로 된 나무침상을 설치하여 12명이 잘 수 있도록 꾸며 놓았다.

저녁은 한국인이 운영하는 사쿠라(SAKURA)에서 김치찌개를 먹으며 모처럼 기운을 되찾았다. 리지앙의 고성분위기는 그야말로 불야성이다. 휘황한 홍등 아래 중국인들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몰려온 젊은이들이 골목마다 뿜어내는 대화의 열기로 활력이 넘친다. 지난 밤 내내 침대버스에서 2∼3시간 토막잠을 자고는 따리에 내려 쉴사이 없이 곧바로 답사에 들어가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리지앙으로 빨리 이동하여 식사를 하고 몇 시간 휴식을 취하니 피로가 좀 회복된 것 같다. 저녁에는 밀린 빨래를 했다. 8元만 내면 셀프로 세탁도 할 수 있는 세탁기가 구비되어 있다.

아침에 일어나 나시족 고성을 산책하러 나왔다. 나시족 전통음악 소리가 골목길을 흐르고 도로 바닥은 작은 돌을 촘촘히 박아 표면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닳아서 반들거렸다. 중심가는 즐비하게 늘어선 식당이나 기념품 가게들로 이어지고 마을 한가운데로는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맞배지붕으로 된 2층 건물들이 좁은 골목길을 마주보며 거미줄처럼 이어져 미로에 빠져든 느낌이다. 골목길엔 전통식품과 의상, 액액서리를 비롯한 각종 기념품 가게들이 골목 안을 가득 메우고 있다.

리지앙구청(麗江古城)은 1999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대연진(大硏鎭)이라 부르는 이 고성은 송나라 때 지은 건축물이다.

총 면적 7,420㎢이며 천년의 역사를 가진 국보급 역사문화 명승지다. 30만 인구 중 나시족(納西族)이 57.5%를 차지하고 있으며, 세계에서 유일하게 상형문자가 통용되는 곳이다.

벽돌을 소박하게 쌓은 작은 문 입구 양쪽엔 해태조각상 2마리가 얌전히 앉아 있다.

사무를 관장하던 목부(木府)의 현판엔 충의(忠義)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들어왔다. 오른편으로 돌아 나오면 일반 주거지가 나타나고 왕이 거처하던 왕부(王府)를 만나게 된다. 광벽루(光壁樓)라는 큰 현판 글씨와 커다란 2층 누각, 왕부 주변의 큰 건물과 높은 담장들이 앞길을 막았다. 미로를 한참 헤맨 끝에 숙소로 돌아와 창강(長江)이 시작되는 후툐샤(虎跳峽) 행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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