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의 신이 된 민준영·박종성 악우(岳友)
히말라야의 신이 된 민준영·박종성 악우(岳友)
  • 박연수 <히말라야 직지원정대장>
  • 승인 2011.09.22 20: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열린광장
히말라야 히운출리에서 후배를 잃은 지 벌써 2년이 지났다. 2009년 9월 25일 오전 8시 30분 "지금 좌측 골에서 우측 골로 이동하는 중입니다. 컨디션은 양호하며 점심시간이나 저녁시간이 되면 무전을 드리겠습니다. 무전을 받기 어려우니 저희가 하겠습니다"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던져주고 히말라야 신으로 남은 민준영·박종성 岳友(악우).

무전이 끝나기 무섭게 안개의 장막 속에 갇힌 히운출리 북벽을 바라보며 무전을 손꼽아 기도하던 우리들에게 불길한 예감이 스쳐온 것은 그날 저녁.

메아리 없는 무전기를 부여잡고 밤새 기도를 했건만 먹통이 돼 버린 무전기. 안개에 휩싸인 히말라야의 히운출리 봉우리는 우리의 애간장을 녹이며 그들과 이별을 예고했다.

충북산악구조대원들로 구성된 직지원정대의 히말라야 도전은 지난 2006년부터 시작됐다.

2006년 가을 대원들은 괴산군 화양동 울바위에서 야영을 하며 전부터 준비하던 해외원정등반에 대한 최종 회의를 마쳤다. 원정대 이름(직지원정대)과 등반 방식(알파인), 직지의 창조정신을 전 세계에 홍보하며 매년 직지루트를 개척하자는 목표를 정했다.

2007년 파키스탄 카라코럼 히말라야 차라쿠사지역 무명봉에 도전장을 던졌다. 하지만 부족한 정보와 날씨, 그리고 정상능선 봉우리에 있는 4개의 큰 바위벽에 부딪혀 눈물을 삼키며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통한의 눈물이 아니라 기쁨의 눈물을 흘릴 준비를 하며 다시 국내의 암장을 다니며 피나는 훈련을 한 후 2008년 다시 찾았다. 베이스에 도착했으나 눈에 띄게 녹아버린 빙하는 우리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대원들과 직접 캠프1, 캠프2를 건설하고 그곳에서 등반 지휘를 하기로 했다. 14일 정상을 공격하기로 떠난 민준영·박종성·박수한 대원은 5900m 지점에서 비박을 하고 16일 새벽 3시 정상을 향해 출발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침이 마르다 못에 목젖이 말라버린 오후 4시 58분(현지시간). 무전을 통해 들려온 "더 이상 오를 곳이 없습니다. 히말라야 직지봉(6235m)을 만들었습니다. 기뻐해 주십시오"라는 외침은 지난 2년의 과정과 그간의 회한을 보상하기 충분했다.

2009년 직지원정대 3차년 계획은 네팔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산군의 히운출리 북벽(6441m)이었다. 어느 누구도 개척을 하지 못한 마의 벽 히운출리 북벽에 새로운 직지루트를 개척하기 위해 9월 3일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고소적응과 정찰, 장비 점검과 계획을 세웠다. 9월 23일. 오랜 준비 끝에 등반 짐을 양 어깨에 모두 짊어지고 베이스를 떠난 대원들. 셀파나 타 대원의 도움 없이 베이스부터 스스로의 힘으로 개척등반을 하고 자랑스럽게 직지루트를 만들어 현존 세계 최고 금속활자 직지와 청주·충북인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알리겠다는 당찬 포부를 이야기하고 떠난 그들, 새로운 개척등반을 이루고자 했던 그들은 꿈꾸어 왔던 히말라야의 품속에서 영원히 머물러 버리고 말았다. 가슴이 미어지고 기억조차 하기 싫었던 그날이 훌쩍 2년이나 흘려 버렸다. 2010년 그들의 가족들과 직지사절단을 이끌고 히운출리에 추모비를 쌓고 천혼제를 지냈으나 그들이 추구했던 알파인등반이라는 과정중심의 개척등반을 제대로 알리지 못한 것이 응어리로 남아 있다. 직지와 청주·충북도민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알리려고 목숨마저 내던지며 등반을 했던 그들을 추모하기 위한 추모비 하나 없으니 살아 있는 자로서의 슬픔이며 안타까움이다. "준영아 종성아 우리는 너희들을 영원히 잊지 않는다. 너희가 목숨을 바쳐 추구하던 창조적이고 개척적인 등반을 직지와 함께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