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안 풍경 사진가 김기찬
골목안 풍경 사진가 김기찬
  • 정인영 <사진가>
  • 승인 2011.09.05 21: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열린광장

“비록 생활은 가난하지만 부족함이 없는 사람들이 골목안 사람들이에요. 작은 일이건 큰 일이건 서로 돕고 또 내가 조금 밑져도 이해하고 포용할 줄 아는 사람들이지요.”

40여년을 골목안 사람들을 찍어온 김기찬씨를 만났을 때 한 말이다. 그는 동양TV 방송영화부에 입사한 후 2년 만인 1966년 가을, 중고카메라 1대를 구입하면서 사진에 첫발을 내디뎠다.

처음에는 방송에 도움이 될까 해서였는데 50년대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이었던 김행오 선생을 직장에서 만나면서 차츰 이 땅에서 어떤 사진을 찍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김행오 선생은 그에게 사진의 평을 해 주기보다는 선생이 갖고 있는 명작 사진집을 보여주면서 사진활동에 힘과 용기를 주었다.

까르띠에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 브루스 테이비슨의 ‘뉴욕’, 유진 스미스의 ‘시골의사와 피츠버그 그리고 스페인의 촌락’, 로버트 카파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윌리엄 클라인의 ‘뉴욕’ 등과 베르너 비숍, 데이비드 세이무어, 로버트 프랭크 사진집을 접한 그는 그때부터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찍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 찾아간 곳이 서울역 염천교 주변이었다. 그는 이들의 주거지인 골목으로 따라 들어갔다. 골목안을 들여다 보려니 서울 중구 중림동이 생각났다. 꼭 고향 같아 사진기를 들이대니 골목안 사람들은 낯선 사람이 지닌 카메라에 거부반응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렇게 구차하게 사는 것이 마냥 창피한 처지에 무슨 사진을 찍느냐는 것이었다.

김기찬 작가는 중림동 사람들과 마음을 터서 거리감을 없게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는 골목안 허름한 집에 라면을 가지고 들어가 주민들과 같이 끓여 먹었다.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가리지 않고 찾아가 만나고 또 만났다. 워낙 성품이 착한 사람들인지라 차츰 마음을 열고 자연스레 필름에 그들을 담을 수 있었다.

그렇게 20여년이 흘러 1988년 중림동 사람들을 찍은 사진전을 출판문화협회에서 열었다. 당연히 전시장에 주인공들을 초대했다. 버스를 전세내 전시장을 찾은 사람들은 이내 자신들보다 나은 처지의 축하객들을 보고 주눅이 들어 한쪽 귀퉁이에 있다가 하나 둘 돌아갔다.

김기찬씨는 전시 후 상당한 금액이 든 봉투를 죽림동 사람들에게 전달했다. 주민들은 어려운 살림에 한 번도 못간 여행으로 평생의 원을 풀었다.

중림동 골목안 사람들의 사진 작업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어 두 번째 같은 주제로 사진전을 열었고, 전시장을 찾차온 중림동 사람들은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각각의 삶을 돌이켜 보며 여기저기서 한숨과 눈물, 그리고 감탄의 놀라움이 쏟아졌다.

지난 세월 속에 세상을 떠난 그리운 부모님과 크고 작은 사연 속의 어제의 일들이 사진 속에 담겨져 있던 것이다. 찢어지게 어려웠던 가난의 설움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사진 속에는 몰라보게 성장한 그들의 자녀도 환하게 웃고 있었으니 어찌 감회가 새롭지 않았을까.

2004년에도 그는 뿔뿔이 흩어진 중림동 사람들의 현재를 찾아 사진기에 담았다. 도심 개발에 밀려 생각지도 않게 시골로 내려간 사람, 이젠 세상 사람이 아닌 이의 가족, 행방불명된 사람들을 찾아 곳곳으로 수소문해 다니며 바쁘게 돌아다녔다.

그는 중림동 골목안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결실로 맺어질 것이란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골목안 풍경’ 사진 작업은 2010년을 얼마두지 않고 저 세상으로 떠남으로써 그의 작업도 그렇게 끝났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달리는 버스의 뽀얀 먼지를 뒤집어 쓰고 외갓집을 가던 때와 빈민들의 친구가 되어 주었던 그. 지금은 어느 하늘에 있는지 문득 그리워지곤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