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려면 기자에게 알리지 마라
그러려면 기자에게 알리지 마라
  • 조한필 부국장<천안·아산>
  • 승인 2011.04.17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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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조한필 부국장<천안·아산>

기자의 직분을 말할 때 '사회의 목탁'등 거창한 말이 오르내리던 시절이 있었다. 언론 외에 사회 감시 기능을 맡을 만한 곳이 드물던 때다.

요즘은 사회 부조리가 발견되면 시민단체 폭로와 동시에 인터넷을 통해 순식간에 퍼진다. 기자의 어깨가 그만큼 가벼워진 것일까. 그렇다고 기자 역할이 줄어든 건 아니다. 독자에게 알릴 만한 정보나 사건을 궁금증 없게 전달하는 데 기자만큼 숙달된 사람은 없다. 그런 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았기 때문이다. 필자도 데스크(기사를 선별하고 다듬는 간부기자)이기 전에 기자로서 매일 기사를 쓴다.

매일 많은 보도자료가 쏟아진다. 기관들은 대부분 자랑거리를 내놓는다. 경찰서는 경쟁적으로 범인 검거를 알리려 한다.

지난 11일 천안의 서북, 동남경찰서 두 곳에서 범인 검거자료가 e-메일로 들어왔다. 내용은 6차례에 걸쳐 전선케이블 1억5000만원어치를 훔친 일당과 빚 독촉에 공기총 '살인미수'를 저지른 피의자였다. 동남경찰서 사건에 관심이 갔다. 채권자를 살해하려 했다는 내용이 요즘의 어려운 경제 상황과도 연관이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경찰 자료 내용을 옮겨보면, 피의자와 피해자는 친구 사이로 채권 채무 관계로 차량 안에서 말다툼을 벌이다 빚 상환 독촉을 받은 피의자가 트렁크에서 공기총을 꺼내 뒷자석의 피해자 뒤통수를 향해 한 발 쐈다.'머리를 관통시켜 살해하려 했으나'(경찰 표현) 약 3주간의 상해만 입히고 미수에 그쳤다. 범행 나흘 후 경찰에 자진 출두한 피의자는 오발 사고임을 주장했으나 '현장 검증과 참고인 진술을 확보해'구속 영장을 신청했다는 것이다.

목격자는 없었다. 그렇지만 고의로 머리를 겨냥해 공기총을 쏜 정황이 인정되기 때문에 살인미수 혐의가 적용된 것이다. 어떻게 그걸 확인했을까. 참고인을 통해서일까. 현장 검증에서 뭔가 드러났나.

궁금한 게 많았다. 대충 써버리고 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후배들에게 "궁금한 점이 없게 기사를 써야 된다"고 여러 번 말하지 않았던가.

경찰서 강력팀을 찾아갔다. 피의자가 오발 사고임을 주장하고 있으니 혐의가 더욱 분명해야 했다. 피해자가 "나를 죽이려고 했다"고 하면 혐의는 쉽게 성립된다. 그런데 "(피의자에게)돈 받을 욕심으로 진술을 번복하고 있다"는 경찰 답변이다. 그래서 '피해자 진술을 확보해 영장을 신청했다'는 얘기가 없었던 것인가. 참고인은 공기총을 판 총포사 주인이었다.

아무리 가능성을 말하는 혐의지만 '머리를 관통시켜 살해하려 했다'는 표현은 수긍하기 힘들었다. 독자에게 피의자 혐의를 명확히 이해시킬 자신이 없었다. '경찰에 따르면'을 내걸고 두루뭉술하게 기사를 쓸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아침, 다른 언론사 보도들을 살폈다. 거의 비슷하게 썼다.'뒤통수를 향해 발사했다'고 경찰 자료를 그대로 옮긴 곳도 있었다. 구속영장은 떨어졌다. 영장을 청구한 검사와 그에 따라 영장을 발부한 판사, 모두 살인미수 혐의를 인정한 것이다. 그래도 미심쩍은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다시 강력팀을 찾았다. "수사 기밀이라 더 이상 알려 줄 수 없다"고 했다. 기자에겐 알려 줄 수 없지만 혐의를 확신할 만한 내용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기자가 수사를 방해해선 안 된다. 하지만 경찰은 검거자료를 낸 이상, 기자가 독자의 알권리를 충족시키려는 데 협조해야 한다. 궁금하게 하려면 검거 자료를 내지 말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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