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연쇄 부녀자 강간사건
1997년 연쇄 부녀자 강간사건
  • 배훈식 기자
  • 승인 2011.03.18 06: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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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관이 기억하는 그때 그 사건
신지욱 <충북지방경찰청 여성아동보호 1319팀장>
미니스커트에 립스틱 짙게 바르고

단서 없어 여장후 잠복근무 … 주민 손가락질도

접근한 범인 격투끝 검거 "생각하면 웃음만…"

"단서가 전혀 없어 여장하고 범인을 유인하기로 했습니다."

신지욱 충북지방경찰청 여성아동보호 1319 팀장(46·사진)은 여장을 해야 했던 사연을 이렇게 말했다.

지난 1997년 1월 중순. 매서운 칼바람이 불던 밤이었다. 당시 청주동부경찰서(현 청주상당경찰서) 강력계 형사였던 신 팀장은 파마머리 가발에 빨간색 블라우스, 검은색 미니스커트를 입고 청원군 내수읍 마산리 아파트 단지를 배회했다. 물론 스타킹과 하이힐도 빼놓지 않았다.

신 팀장은 "한겨울 찬 바람이 어찌나 세던지 온몸이 얼어붙었다"며 "여자들은 겨울에 치마를 어떻게 입고 다니는지 모르겠다"고 몸서리쳤다.

신 팀장이 한겨울 찬 바람을 맞으며 여장을 하고 밤거리를 배회한 이유는 부녀자 납치 강간범을 잡기 위해서였다.

범인은 승용차를 몰며 밤거리를 홀로 걸어가는 여성들에게 접근해 데려다 준다며 태워 강간하고 금품을 빼앗았다.

그는 "신고를 받아 수사에 착수했지만, 조그만 단서 하나 찾지 못했다"며 "피해자들도 수치심에 진술을 꺼렸다"고 말했다.

인상착의는 물론, 범행에 사용한 차량의 차종이나 차량번호 등 실마리가 전혀 잡히지 않았다. 피해자들이 꺼려 DNA 확보 같은 건 꿈도 못 꿨다.

고육지책으로 내놓은 아이디어가 바로 여장으로 유인하는 것이었다.

신 팀장은 "처음에는 얼굴이 여성스러운 고참이 여장하고 잠복했는데 배가 올챙이처럼 볼록해 실패했다"며 "결국, 내가 역할을 했다"고 박장대소했다.

신 팀장의 여장에는 그의 아내와 다방 여종업원들이 한몫했다. 아내는 매일 잠복을 나가는 남편의 얼굴에 직접 화장을 해 줬다. 파우더와 립스틱, 마스카라까지 최대한 예뻐 보여야 한다며 정성스레 화장했다.

집에 못 들어간 날이면 경찰서 앞 다방에 찾아가 여종업원들에게 부탁하기도 했다.

신 팀장은 "범인 검거를 위한 일이라는 걸 알고 아내가 불평 한마디 없이 매일 도왔다"며 "다방 여종업원들도 흔쾌히 거들었다"고 말했다.

잠복근무는 열흘 넘게 계속됐으나 범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시간이 길어지면서 동네주민들에게 오해를 받는 일도 생겼다.

한겨울 밤, 거리를 매일같이 미니스커트에 하이힐을 신고 배회하는 신 팀장을 이상히 여긴 주민들은 경찰에 신고하기도 했다.

버스정류장 벤치에 앉아 있는 신 팀장에게 말을 걸려다 놀라 도망가는 동네 청년들도 있었다.

그는 "추위도 추위지만 동네 주민들의 눈초리와 손가락질도 숱하게 받았다"며 "범인도 못 잡고 괜한 짓을 하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보름째 되던 날 밤, 신 팀장 옆으로 흰색 승용차가 빠르게 지나갔다.

50여m를 더 간 승용차는 갑자기 멈추더니 후진해 신 팀장 옆에서 멈췄다. 이윽고 조수석 창문을 내린 남성이 말을 걸었다.

"어디까지 가세요? 태워다 드릴게요."

직감적으로 범인임을 확신한 신 팀장은 말없이 차에 올라탔다.

차에 올라타자마자 여장남자임을 알아챈 남성은 흉기를 들고 격렬히 저항했다. 결국 인근에 잠복해 있던 형사들이 가세해 격투 끝에 검거했다.

신 팀장은 "차를 타 보니 조수석 햇빛가리개에 흉기 3개가 보였다"며 "흉기를 든 범인과 좁은 차 안에서 격렬하게 몸싸움을 벌였다"고 회상했다.

부녀자 연쇄 강간범 J씨(당시 35세)는 조사 결과 총 43건의 강도·강간을 일삼은 것으로 드러났다. J씨는 재판에서 모든 혐의가 인정돼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복역하다 결국 교도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신 팀장은 "여장을 했던 기억은 재미난 술 안줏거리가 됐지만 당시 피해자들의 상처는 너무 깊었다"며 "정신적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결국 이민을 떠난 피해자가 가슴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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