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에 대한 묵상
무지개에 대한 묵상
  • 충청타임즈
  • 승인 2011.01.10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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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자의 목소리
이근형 <포도원교회 담임목사>

"하늘의 무지개를 보노라면 / 내 가슴은 뛰노라 / 내 인생 시작되던 어린시절에도 그러했고 / 어른이 된 지금도 그렇거늘 / 늙을 때 또한 그러하리라 / 아니면 죽을지어다! /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 내 하루하루가 / 순수한 경건으로 묶여지기를 바라노니!"

18세기 영국의 시인 William Wordworth의 무지개라는 시이다. 중학교 2학년 땐가, 영어시간에 외워두었던 이 한 편의 시가 지금 중년의 때에 갑자기 떠오른 건 왜였을까?

아마 그 시구(詩句) 끝에 있는 '경건(piety)'이라는 단어 때문이리라. 작년 말쯤 본보의 기자로부터 본란의 필자가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고 기독교의 목사인 필자가 본란을 통해 교회 밖의 독자들과 작은 소통이라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으로 쉽게 응락을 했다. 그리고 곧 후회를 했다. 늦은 후회지만, 부족하기만 한 필력으로 혹여 기독교와 비기독교인 모두에게 어떤 심적 부담이라도 안겨주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필자의 첫 기고문부터 그 염려가 현실이 될 것 같은 일이 생겼으니, 신년 벽두부터 접하게 된, 필자가 몸담고 있는 기독교 사회의 거대 교회에서 터진 불경한 소식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어서이다.

서울의 모 교회에서 일어난 목사님들의 폭행사건, 그리고 세계 최대의 회집 인원을 자랑하는 교회와 그 교회를 비방했다는 교회와의 고소 고발사건. 이 아픈 소식이 신년 벽두에 하루상관으로 신문지상에 보도됐다. 목사로서 당연히 누가 알까 덮어 두고 싶은 내용이다. 이런 우리들의 치부를 누워서 침 뱉는 격으로 굳이 첫 기고문으로 올리고자 하는 필자의 심정을 독자들은 얼마나 알아주실까 이런 아픈 마음속에 떠오른 시 한 편이 바로 '무지개'였다. 그 시의 끝 행은 이렇다.

'Bound each to each by natural piety!(순수한 경건으로 묶여지기를!)'

왜 싸우는가? 아마도 이에 대한 대답은, 우리가 신앙인이 될 것이냐, 종교인이 될 것이냐의 물음에 대한 대답에서 나와야 될 것 같다.

신앙인이란 한 종교 안에서 믿음을 가지고 섬기며, 그 안에서 의지하며 구원의 길을 찾아가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리고 종교인이란 그 신앙인들을 돕는 전문가가 된 사람들이리라.

그리고 종교인과 신앙인 모두 추구해야 할 덕목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piety' 즉 '경건'일 것이다. 그것을 잃게 되면 종교인 노릇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신앙인의 길은 어렵지 않을까?

필자는 올해의 교회표어를 '경건과 덕을 세우는 교회'라 정해놓고 그에 따른 구체적인 실천사항들을 성도들에게 제시했다. 경건의 회복, 그것이 올 한 해 우리네 삶의 방향이다. 성경 레위기 19장 2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Wordworth가 말한 piety(경건)는 하늘에 걸린 무지개를 보고 대자연의 창조주를 향한 가슴뛰는 어린아이 같은 경외심이다. 그래서 그는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선언했다. 대자연의 현상인 무지개를 보고 가슴이 뛰도록 그 창조주에 대한 경외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세상 모든 소위 '어른'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훈계하는 '아버지'가 될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즉 순수한 경건을 가진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야말로 세속의 불경으로 얼룩진 시대에 아버지 역할을 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리고 그 시의 중간부분은 이렇다.

'Or let me die!(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죽음을)'

실로 단호한 선언이다. 신년벽두에 들려온 아픈 소식은, 이렇게 죽음을 각오하고 경건을 회복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어느 사이엔가 기쁜 소식(복음)으로 바뀌어 있을진저! 아, 우리에게 '아버지' 역할을 해 줄 그 경건한 '어린이'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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