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가 멈추게 한 전쟁
축구가 멈추게 한 전쟁
  • 이재경 기자
  • 승인 2010.05.30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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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이재경 부국장 <천안>

26일 새벽 3시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북한과 그리스와의 축구 평가전. TV 중계로 우리 안방에 생생히 전해진 이 경기에서 북한은 예상외의 선전을 펼치며 월드컵에서 우리와 맞붙을 그리스와 2대2로 비겼다. 새벽에 밤잠을 설치고 이 경기를 지켜본 사람들은 기대 이상의 북한의 선전에 놀라며 사상 첫 남북 동반 16강 진출의 꿈을 키워갔다. 다음날 아침 스포츠 화제는 단연 이 경기 결과였다. 인터넷 포털에서도 이 뉴스는 검색 순위 1,2위를 차지할 정도로 관심이 컸다.

하루 전인 25일. 한국 증시는 패닉에 빠졌다. 북한에 전군 전투태세 돌입 명령이 떨어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코스피 지수는 한때 무려 72.25포인트, 4.5%나 폭락하며 시가 총액 수조 원을 일순간에 허공에 날렸다. 환율도 크게 치솟았다.

천안함 사태가 불러온 경제, 사회적 파장은 이제 겨우 시작 단계였다. 이틀 후 북한은 개성공단 육로 통행 전면 차단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정부에 비상이 걸렸다. 개성공단 육로 차단이 실현될 경우 개성 공단에 체류하고 있는 우리 근로자들의 '인질화' 우려 때문이다. 실제 우리 정부는 미국과 협의, 주한 미군을 동원해 구출작전까지 펴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이쯤 되면 전쟁 수준 아닌가.

다시 축구 얘기. 정부가 월드컵 단독 중계권을 가진 SBS의 월드컵 경기 방송 북한 송출을 불허할 것이라는 얘기가 들린다. 지난 18일 통일부는 "방송 전파도 대북 반출 승인 대상인 만큼 정부의 방침을 따라야 한다"고 밝혔다. 천안함 전모가 밝혀지기 이틀 전의 얘기니 사실상 물 건너간 것 아니냐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를 반영하듯 이후 지금까지 이 문제는 언론매체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고 있다. 앞서 '북한 주민이 한국을 통해 월드컵을 시청하게 되면 남북간 긴장완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던 언론들도 지금은 입을 닫아버렸다. '전쟁'앞에 축구 중계 따위는 이슈가 되지 못했다.

이번 월드컵에서 북한과 맞붙을 코트디부아르의 국가대표 디디에 드록바(EPL 첼시 소속). 그는 2005년 조국을 최초로 월드컵 본선에 진출시킨 영웅이다. 그러나 그가 영웅으로 추앙받는 것은 축구를 잘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내전이 10여 년간 지속되고 많은 사람이 죽자 그는 그해 방송에서 대국민 호소를 통해 "제발 1주일 만이라도 전쟁을 멈춰달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놀랍게도 이게 받아들여졌다. 정부군과 반군이 그의 호소를 들어준 것이다. 건국 후 최초로 전쟁이 한 달간 멈췄다. 그리고 2년 후 내전은 완전히 종식됐다. 사가들은 세계 축구사의 기적이라 말했다.

내전 상황과 다르긴 하지만 지금 일촉즉발인 우리 남북관계도 뭔가 기적 같은 변화가 없을까. 1990년 평양 능라도경기장에서 남북통일축구가 열렸다. 그때 15만 북한 관중이 손에 한반도기를 들고 '조국은 하나다', '통일된 조국을 후대에 물려주자'라는 구호로 남북을 응원하며 가슴 뭉클한 장면을 연출한 것을 우리는 생생히 기억한다. 이게 북한 다수 민중의 본심이 아닐까.

천안함 사태에 따른 북한에 대한 강력하고 합당한 제재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의 우리 희생도 따를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쟁은 안 된다. 이미 60년 전 200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6.25전쟁의 공포를 우리는 잘 안다. 답답하다. 반성도 없다. 변화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이성이, 감성이 먹혀들지 않는 북한의 호전적 위정자들. 축구 스타의 눈물어린 호소로 전쟁을 끝낸 아프리카 변방의 사례가 그래서 기적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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