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과 자유로부터의 도피
수능과 자유로부터의 도피
  • 충청타임즈
  • 승인 2009.11.12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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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정규호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입동을 지나 동지를 향해 가는 계절의 끝자락, 시퍼런 낮달이 서럽습니다.

시나브로 밤은 길어지고 지금쯤 아이들은 귀가를 서두르고 있을 테지요.

세상이 사뭇 시커멓게 변한 밤길을 조심조심 걸어 고사장을 빠져 나오면서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아이도 있을 것입니다.

그 하늘에 별이라도 총총 그윽한 눈길을 내려주었으면 참 좋을 테지요.

어떤 아이는 어깨를 잔뜩 웅크린 채 땅 바닥만 바라보며 비탄에 빠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초등학교 6년과 중·고등학교 3년씩 도합 12년을 오로지 이날 단 하루 동안 치러진 대학수학능력시험에만 집중해야 했던 아이들 어깨는 여전히 애처롭습니다.

모든 일이 단 하루 만에 마쳐지는 허무함의 극치는 해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진 날, 시커먼 어둠과 함께 여전한 이 땅의 살풍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막막함에서 '수고했다.'라는 말과 함께 그 아이들의 발밑을 밝혀주는 가족의 화사한 자동차 불빛은 그 자체가 따뜻함일 것입니다.

불 꺼진 수험장을 나서는 아이들의 마음엔 '이제부터는 자유'라는 생각이 꿈틀대겠지요.

그러나 그 자유는 아직 완벽한 것은 아닙니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은 그의 저서 자유로부터의 도피 에서 인간이 많은 자유를 갖게 되면 보다 많은 고독과 무의미성, 고립을 느끼게 된다고 설파합니다.

에리히 프롬은 오히려 인간은 보다 적은 자유를 가짐으로써 보다 많은 소속감 및 안정성을 느낀다고 강조합니다.

일본 동경대학 정보학 연구소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재일동포 강상중은 자유로부터의 도피 에서 착안해 "일반적으로 사람은 자유를 동경한다고 생각하지만, 자유로부터 도망쳐 '절대적인 것'에 속하고 싶어 하기도 합니다"라고 말합니다.(강상중, 고민하는 힘, 도서출판 사계절)

대학수학능력시험은 이 땅 대한민국에서 실로 엄청난 위력을 갖고 있는 '절대적인 것'에 다름 아닙니다.

그 통과의례를 거치지 않고는 이 땅에서 인간다운 삶은 기대조차 할 수 없는 현실이 삭막합니다.

거의 대부분의 고3은 일제히 치러야만 하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일 밤, 어둠이 아이들의 얼굴을 더 파리하게 하는데, 신종 플루의 극성은 이제 내 주변도 압박해 옵니다.

이제 겨우 세 살을 갓 넘긴 딸이 신열로 고통스러워 한다는 후배의 안타까움에 겨우 위로한답시고 '네 딸이 유행에 민감한 모양'이라는 말을 내뱉는 내 자신이 참으로 허허롭습니다.

때가 되면 일제히 시험을 치르느라 전 국민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또 절반에 가까운 이들이 신종 플루의 위험에 전전긍긍하는 획일화의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4대강에 일제히 삽질은 시작되는데, 혹시 이번 수능에 '731부대'나 '마루타'같은 까다로운() 문제는 나오지 않았겠지요.

만약에 그런 문제가 나와 오답이 많을 경우 그건 우리가 사람을 잘못 만나서 그랬다고 자책하거나 위안을 삼을 수 있을까요.

만일 이번 수능에 헌법재판소에 대한 문제가 나와 '절차상 위법은 인정되지만 법안 가결은 무효로 볼 수 없다'와 같은 식의 정답을 요구했다면 과연 우리 아이들은 그 답을 제대로 찾을 수 있을지도 의문스럽습니다.

그리하여 사회탐구영역이 단순히 대학수학능력시험의 한 과목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그 해석에 갈팡질팡하는 시대의 새로운 탐구 과제로 남는 것은 아닌지 궁금할 따름인데.

신종 플루로 인해 시름이 곱절이 된 우리의 아이들 가녀린 등 뒤로 자유는 아직 멀게만 느껴지고 당분간 밤은 길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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