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만에 채운 첫 단추
60년만에 채운 첫 단추
  • 충청타임즈
  • 승인 2009.11.10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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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강태재<충북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상임대표>
1959년 가을 정부통령선거를 반년정도 앞둔 어느 날, 서울 명동 시공관에서 전국학생웅변대회가 열렸습니다.

청주에서 올라 간 중2 어린 학생은 '색연필'이라는 연제로 남북분단 현실에서 나라를 이끌어 갈 지도자는 이승만 대통령뿐이라는 주장을 펼쳐 이기붕 국민회 회장상과 금메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3·15부정선거, 4·19혁명이 일어나면서 이승만에 대한 그의 인식은 처참하게 일그러졌습니다.

나아가 김구를 비롯한 상해임시 정부와 미국에서의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비교하고, 광복 후 친일파를 청산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기용한 이승만의 속셈이 무엇인가.

그것은 광복을 이룬 조국에서 친일파를 숙청하고 신생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할 때, 임시정부가 주도하게 될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기에, 이승만은 오히려 친일파를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만들어 집권의 야욕을 채우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평생을 항일독립운동에 바쳐 온 이승만이, 악명 높은 일제 고등계 형사출신 수도경찰청 수사과장 노덕술을 체포한 반민특위에 석방 요구를 할 수 있었을까요. 여의치 않자 친일 경찰을 시켜 테러를 자행하고 국회의원을 체포하여 빨갱이로 몰아 처단하는 만행을 어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잘못 꿰어진 첫 단추로 인해 일제잔재는 청산되지 않았고, 왜곡돼 왔습니다. 광복을 이룬 지 64년, 반민특위가 무너진 지 60년 만에 잘못 채워진 단추를 다시 꿰는 첫 번째 역사가 이뤄졌습니다. '친일인명사전' 전3권이 그것입니다. 2004년 대한민국국회는 이 사전 발간비 3억 원을 전액 삭감했고, 이에 우리 국민들은 5억 원의 성금으로 지지했습니다. 중2 때 멋모르고 이승만을 지지했던 그 소년도 군에 입대한 아들의 이름으로 성금을 내며, 역사바로세우기에 벽돌 한 장을 얹었습니다.

친일인명사전을 두고 엄청난 반발과 방해공작이 끊이지 않았다는 것은 알려진 것보다 훨씬 강도가 높았다고 합니다. 일부 억울함을 호소하는 후손이나 단체가 있지만, 오히려 반성하고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가장 흔히 듣는 반론이, 그 엄혹하던 시절에 일제에 부역 안 하고 어찌 살아갈 수 있었겠느냐는 겁니다. 대개 이런 말을 하는 쪽은 전쟁무기를 헌납하는 돈을 내놓은 사람이거나 제 나라 조선의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데 앞장섰던 자들입니다.

그럼, 묻겠습니다. 그 돈으로 만든 무기가 누굴 죽였겠습니까. 전쟁터로 나간 젊은이들이 누구와 총부리를 겨누었겠습니까. 만약 그 짓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목숨을 빼앗았겠습니까. 당신이 하는 돈벌이에, 당신이 누리던 권력에, 당신이 누리던 명예에 영향이 미치기는 했겠지만, 적어도 생명의 위협까지 받지는 않았잖습니까. 그리고 당신이 국내에서 일제에 빌붙어 영달을 누리고 있을 때 항일운동, 독립군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목숨을 바쳤거나 아니더라도 풍찬노숙의 고통을 감내해야 했으며, 후사가 끊기거나 아니더라도 제대로 먹이지도 입히지도 가르치지도 못해 가난을 대물림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나라 팔아먹은 대가로 빼앗거나 얻은 땅과 재산을 환수하는 것조차 거부하는 몰염치한 매국노의 후손들, 선조의 친일이 부끄러워 자숙은 못할 망정 제 조상의 친일행적이 공개되는 것을 보지 못하겠다는 파렴치함을 계속 용인해야 되겠습니까.

이제 첫 단추를 바로 꿰었으니 나머지 단추도 바로 채우는 데 더욱 박차를 가해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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