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안중근을 기억하자
불멸의 안중근을 기억하자
  • 충청타임즈
  • 승인 2009.11.08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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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김효겸 <전 충북도 부교육감 호서대 초빙교수>
안중근(安重根) 의사는 중국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했다. 벌써 10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안중근은 31세로 순국했다.

안중근은 인재양성을 위한 교육운동과 계몽운동 등을 벌였고, 러시아에서 의병활동을 했다. 안중근은 한국이 역사의 피해자로서 단순하게 일본에 저항한다는 차원을 뛰어넘어 동아시아 미래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관심을 가졌다. 탈(脫)민족주의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간도에 진출해서 동포를 모아 무장한 뒤 1908년 함경북도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일본군 일부를 포로로 잡았다. 그때 그는 '이토와 같은 정치가의 잘못으로 전쟁터에 나왔다'라고 하면서 석방시켰다. 현실적인 인식을 하면서도 마치 예수의 사랑에 버금가는 이상주의 사상을 보여주었다. 안중근의 국제정치 인식은 매우 현실적이었다. 당시는 약육강식과 제국주의적 시대였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제국이 취할 수 있는 독립운동의 방법은 실력양성운동과 무장독립운동이었다. 그는 자신의 거사를 만국공법(國際法)에 의해 적국과 교전을 치르는 것이라고 했다. 일본법정에서 일본법에 의해 재판을 받는 것이 심히 온당치 못하다고 주장했다.

1910년 재판과정 중 고등법원 청취에서 한·중·일 3국이 동양평화회의체를 구성하고 3국이 뤼순(旅順)에 은행을 설립하고 공동화폐를 발행하여 3국청년으로 구성된 공동 군대를 창설하는 등 한중일이 협력하는 공동체를 제시했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안중근 의사는 민족의 선각자요, 아시아 한·중·일 3국의 평화를 주창한 최초의 동양선각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에 대한 평가는 초·중·고 교과서 일부 정도에서 부각되어 있고 남산에 설치된 동상 정도가 고작이다. 그가 민족에게 준 업적에 비하면 좀 초라한 느낌이 든다. 100주년을 맞이해서 동북아 재단 중심으로 학술발표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긴 했다.

또 하나는 안중근을 한국 독립운동의 영웅으로만 본다면 많은 것을 놓치게 된다는 것이다. 중국 하얼빈 시의 안중근 전문가인 재중동포 서명훈씨(전, 하얼빈 시 민족종교사무국 부국장)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식민지 피압박 민족을 대표했으며 동양평화의 교란자를 처단함으로써 아시아의 평화에 이바지한 세계사적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점을 분명히 귀담아들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은 한국침략의 원흉 및 동양평화의 파괴자에 대항하여 인간의 자유를 지키려는 정의의 응징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안중근 의사를 존경한다는 일본인 고마쓰아키오는 1994년 천안 독립기념관을 찾아가 안중근 의사의 존재를 처음 알고 안 의사의 동양평화정신과 역사적 배경을 연구하면서 안 의사를 존경하기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이유 15가지 중 하나가 명성황후 시해인데 이것을 공부하고, 이해하면 지금 한·일 간에 봉착한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를 풀 수 있다고 말했다. 고마쓰아키오씨는 '일본인 중에 안 의사가 왜 일본초대총리까지 지낸 이토를 살해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이것은 일본이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실증적 사례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젊은이들은 이 점을 확실히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역사는 반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주권을 잃은 국민의 서러움을 다시금 되새길 때 안중근 의사의 순국정신은 우리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이다. 불멸의 안중근을 외쳐보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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