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의 힘
박근혜의 힘
  • 충청타임즈
  • 승인 2009.10.26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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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한덕현 <본보 편집인>
놀랄 것도 없다. 사실 '수정 불가'라는 박근혜의 세종시 발언은 이미 예견됐다고 볼 수 있다. 민주당이 대표까지 나서 박근혜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물을 때부터 알 만한 사람들은 이를 감지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만약 박근혜가 세종시 수정론에 동조를 표했다면 결과는 어땠을까. 물론 일부에선 이런 구도를 주저없이 점쳤다. 그가 대통령 특사로 유럽을 방문한 데다 MB 지지율이 한때 50%를 웃돌았던 상황이라면 대통령과 여당이 모두 나서 올인하는 문제에 반기를 들기란 쉽지가 않았다. 정치적으로 따져봐도 이는 다분히 비현실적이다. 이것이 보통의 상식이다.

하지만 박근혜는 어리석게도(?) 대통령과, 자신이 둥지를 틀고 있는 당에 직설적인 어깃장을 놓았다.

이 마당에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만약 그가 세종시 수정안에 손을 들어줬다면 더 이상 '대통령과 같은 반열(!)'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지난 미디어법 통과시 당초의 입장을 번복해 어정쩡한 중간자를 택함으로써 야당은 물론 여당으로부터도 십자포화를 맞은 전력 때문이다. 이때 그가 집착하는 '원칙주의'는 훼손될 수밖에 없었고, 그러기에 이번 언급은 정체성을 되찾기 위한 매우 계산된 발언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한나라당엔 다시 박근혜 비상경계령이 떨어졌다. 청와대까지 꿀먹은 벙어리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정치에 대한 실효성 여부를 떠나 박근혜의 이런 영향력은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 건가. 가만히 있다가도 불쑥 던지는 말 한마디에 정국이 요동치는 것도 기현상이거니와 무엇보다도 그 내공의 실체가 궁금해지는 것이다.

박근혜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늘 반복돼 강조되는 단어가 몇 개 있다. 신뢰, 약속, 믿음 등이다. 우리나라 정치판에서 이에 집착한다는 건 어찌 보면 어리석다. 이것이 빌미가 돼 때만 되면 나타나 이른바 '훈수정치'를 즐기는 그에 대해 비판자들은 이상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인다. 친이로 불리는 한나라당 주류 역시 이 점을 가장 못마땅하게 여긴다. 남은 죽어라 지지고 볶고 하면서 세(勢)를 이끌라치면 난데없이 공자님같은 말씀으로 판을 깬다는 푸념인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에겐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 일관된 이미지가 하나 있다. 누구보다도 절제된 말과 행동을 구사한다는 점이다. 세종시 발언 역시 외부에 비쳐진 것처럼 등원하던 중 우연히 만난 기자들에게 생각나는 대로 던진 말이 절대 아니다. 그러기엔 문제의 발언이 던지는 메시지와 의지가 너무 분명하다.

외부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박근혜는 민생 투어에서 만난 시장 아줌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관계 요로에 몇 번이고 확인하는 치밀함을 보이기도 했다. 그가 쉽게 얘기하고 쉽게 치부하는 성격이 아님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은 박근혜가 누렸던 가정환경이다. 로열패밀리였지만 그는 늘 이율배반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가 가장 존경한다는 아버지 박정희부터 그렇다. 일본의 무사도와 칼의 문화를 가까이 한 카리스마의 소유자이면서도 한편으론 청와대의 어두운 구석에서 혼자 단소를 부는가 하면 심수봉의 '그때 그사람'을 즐겨 부른 여린 감성의 소유자였지 않은가.

게다가 어머니 육영수는 아버지와 달리 학의 목으로 상징되는 자애(慈愛)의 분신이었고, 그런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명횡사로 잃게 됨으로써 박근혜에겐 자연스럽게 경험상의 통찰력이 생겼을 수도 있다.

심리학적으로도 이러한 가정환경과 성장배경은 필히 말과 행동에 있어 절제 본능을 형성케 하고, 이것의 결정체는 승부사적 근성이다. 몸을 낮추는가 싶다가도 결정적일 때 '한 방'을 들고 나오면서 지난 2006년 지방선거 땐 "대전은요" 한마디로 판세를 뒤집은 그의 힘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박근혜의 세종시 발언 후폭풍은 10. 28 재보선이 끝나면 필히 불어닥친다.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세종시 운명이 더욱 궁금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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