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지태의 잔인한 추억
아지태의 잔인한 추억
  • 충청타임즈
  • 승인 2009.07.20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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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한덕현 <본보 편집인>
   드라마 '찬란한 유산'이 시청률 40%대를 유지하며 중고등학교 여학생들 사이에서도 단연 화제 1순위라고 한다. 한자릿수 시청률도 녹록지 않은 현실에서 사실 이 정도의 반응은 보기드문 현상이다.

하지만 2000년 4월 첫 방송돼 무려 2년 동안이나 안방을 사로잡은 '태조 왕건'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이 드라마가 한창 잘 나갈 땐 60%대라는 경이적인 시청률을 이어갔다.

그런데 '태조 왕건'은 충북인들에겐 여전히 찜찜함으로 기억된다. 문제의 드라마가 물이 오를 시점에서 등장한 '아지태'라는 인물 때문이다. 청주 출신인 아지태는 궁예의 책사로 그가 왕국을 건설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하지만, 극중에서의 이미지는 형편없었다.

주군인 궁예가 아첨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주변인을 참소하는가 하면 자신의 입지를 위해 궁예와 왕건을 이간질하는 아주 비열한 인간쯤으로 묘사됐다.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표변할 수 있는 변절자로 부각된 것이다. 자료 부족으로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규명할 수는 없지만 아지태는 각종 역사책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문제는 이런 아지태라는 캐릭터가 엉뚱하게도 충북, 더 나아가 충청의 지역 정서나 정치적 성향과 결부돼 시청자들에게 어필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태조 왕건'이 상종가를 칠 당시 외지의 친구나 지인들로부터 비아냥 섞인 안부를 들은 지역인들이 적지 않았다.

각종 정치적 현안을 만날 때마다 지방언론에 단골로 등장하는 것이 충북 혹은 충청의 정체성이다. 불행하게도 밖에서 보는 시각은 아직도 정립이 안 됐다. 이는 정치적 성향과도 무관치 않다. 분명한 색깔이 없으니 남들의 시선을 끌 리가 만무하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는 1961년 5·16 주역으로 정치무대에 등장해 정계를 은퇴한 2004년 4월19일까지 무려 반세기 동안 충청을 대리(?)했던 JP에게 궁극적인 책임이 있다. 그가 지역을 볼모로 막판엔 3당 합당(1990)이나 DJ와의 후보단일화(1997)를 모험하면서까지 정치를 연명했지만, 그 이면에선 자신을 키워준 '충청'이 오히려 심각하게 신음한 것이다.

그가 노태우와 김영삼을 거쳐 김대중의 품으로 옮겨다니는 과정을 남들은 어떻게 보았을까. 아마도 드라마의 아지태를 접하고는 대의보다는 눈앞의 이익에만 연연하는 그런 군상들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결국 JP는 박정희의 민주공화당을 만들 때부터 죽을 힘을 다하고서도 대접받지 못하고 일본으로 망명하더니 끝내 '들러리'로 정치를 마감했다.

안타깝게도 충청도가 다시 시험에 들고 있다. 코너에 몰린 이명박 정부가 난세를 의무하겠다며 히든 카드로 내민 논산 출신 천성관이 비참하게 낙마했는가 하면, 충청의 맹주임을 자처하는 자유선진당은 한나라당과의 연대, 이른바 한-자 동맹 여부로 그동안 꿍꿍 숨겨왔던 충청도의 촉수를 건드리고 있다.

천성관의 좌절은 지역의 정치적 성향과 결코 무관치 않다. 영호남의 갈라진 이기(利己)로부터 벗어나 균형된 인물을 내세우겠다는 의도는 좋았지만 그 발상 자체가 하다 못해 '충청의 지분' 개념도 아닌 가진 자의 일방적 시혜(施惠)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서두르지 말았어야 했다. 천성관 스스로가 자리를 덥썩 물기 전에 본인을 먼저 되돌아 봐야 옳았다.

세종시법 합의처리를 계기로 지금 뜬금없이 나도는 한-자 동맹 혹은 여당과 충청권 연대 역시 우리로선 쉽게 받아들일 사안이 아니다.

물론 정치는 늘 타협과 연대, 협상을 전제로 한다. 그렇더라도 이원종 심대평 총리설이니, 보수 대통합이니 하는 말들은 위험하기 그지없다. 그렇게 되기 위한 정치적 명분이 아직은 하나도 없다.

고작 충남권에만 깃발을 꽂은 선진당은 자민련의 전철은커녕 자칫하면 이마에 젖내가 가시기도 전에 호적을 파가야 할지도 모른다. 정치에선 나에게 세(勢)가 없는 상황에서의 짝짓기는 무의미하다. 결국엔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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