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관님, 그리고 판사님
대법관님, 그리고 판사님
  • 충청타임즈
  • 승인 2009.05.18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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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한덕현 본보 편집인
   광복 이후 국내 사법파동의 실제적인 효시는 1971년 사건이다. 그해 7월28일 서울지방검찰청이 서울형사지방법원에 두 법관과 입회서기를 피의자로 하는 구속영장을 신청한 것이 사단이 됐다. 당시 이들에게 씌워진 혐의는 국가보안법위반 사건의 심리와 관련 이 사건의 증인청취를 위해 제주도로 출장신문을 다녀오면서 담당 변호인으로부터 왕복항공료와 술값 등 9만7000여원의 향응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이에 서울형사지방법원 판사 전원이 일괄 사표를 내며 즉각 반발했고, 그 파장은 서울가정법원, 전주지법, 청주지법, 대구지법, 부산지법 등 전국 법원으로 이어지며 결국 "이런 시국에서는 소신있는 재판을 할 수 없다.", "사법권이 이렇게 짓밟히고는 참을 수 없다."는 판사들의 공분으로 집단화됐다.

그때만 해도 변호인의 이런 기본적인 편의제공은 의례적 관행이었고 사안자체가 기소유예처분이 가능한 경미한 것이었는데도 굳이 검찰이 신분이 보장된 법관 구속이라는 무리수를 둔 것이다. 그래서 이 사건의 궁극적 배경에 의문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그 직전에 내린 대법원의 잇단 위헌판결과 무죄판결에 대한 감정적인 보복이라는 진단까지 나왔다. 물론 이는 법조계 쪽의 주장이다.

지금 국내 법조계를 벌집으로 만들고 있는 신영철 대법관 파동은 38년전 사건과 닮은꼴이 많다. 처음 서울중앙지법에서 불거진 법원장의 '이메일 재판간여' 시비가 전국 법원으로 확산되면서 사법권의 본질마저 도마 위에 올려졌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작금의 사법권 침해논란은 그동안의 패러다임을 깼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사법권 침해의 당사자는 정권으로 상징되는 권력과 행정권을 대표하는 검찰이었다. 사법파동 역시 이들 외부 세력의 재판권 간섭을 차단하기 위한 판사들의 집단행동으로 표면화된 것이다.

그런데 이번 사법파문은 성격이 다르다. 신영철 전 서울중앙지법원장의 촛불재판 간섭이라는 사법부 내부의 갈등이 단초가 된 것이다. 적절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대자적(對自的) 관점이 아닌 즉자적(卽自的) 관점에서의 사법권 논란인 셈이다.

문제는 사안의 경중으로 볼 때 이번 파문은 그 심각성이 더하다는 점이다. 법원 내부로부터의 재판권 침해, 다시 말해 법원장이나 법원행정처 등 사법행정권자들에 의한 재판 간섭은 곧바로 국민들에게 사법부에 대한 원초적인 불신을 안기기 때문이다. 시쳇말로 자기들끼리 물말아 먹는다는 비판을 받아도 할 말이 없다.

원론적인 얘기지만 사법부는 국민기본권을 수호하는 최후의 보루가 된다. 어떠한 경우에도 직업적 양심에 충실하려는 법관들의 재판과 판결은 보호돼야 하며, 그러기에 사법권은 늘 권력과 행정권이라는 거대한 압력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법치(法治)가 원리인 민주국가에선 행정권도 당연히 사법부의 심판에 복종해야 하며 이것이 자유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근거이자 힘이다.

유신 이후 제5공화국까지 우리나라 사법부가 '권력의 시녀' 내지 '검찰의 영장담당 부서'라는 오명을 들은 것은 냉정하게 말해 판사들의 책임이 크다. 민감한 시국사건에 대해 적당히 줄타기를 하는 이른바 '타협판결'로 신변의 안위를 추구함으로써 추상같은 사법권을 권력이나 사법행정권자들에게 상납했다면 부인하겠는가.

이번 사태를 사법파동으로 규정해야 하는지는 전문가들이 알아서 판단하겠지만 우리가 법관들의 집단행동에 주목하는 이유는 또 있다. 그동안 잊을 만하면 불거지는 사법파동 때마다 그 해법은 참으로 두루뭉실했다. 초기엔 법관들의 집단항거가 대세를 이루다가도 시간을 지체하거나 대법원장 등 수뇌부에게 해결을 일임함으로써 사태의 본질을 훼손시키기 일쑤였다.

세태에 휩쓸리기 싫은 법원과 법관의 생리를 이해한다 하더라도 이러한 미온적인 수습과 처리는 되레 스스로의 발목을 잡는 꼴이 됐다. 용두사미식 엉거주춤한 자세가 결국 제2, 제3 사법파동의 악순환을 초래했다면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정치권력은 본질적으로 '자제'와는 거리가 멀다. 때문에 이에 맞서 사법권을 곧추세우는 힘은 바로 법관들의 굳은 신념뿐이다.

외부 세력의 개입도 아닌 법원장의 재판간섭에다 그 당사자인 법관들이 심적 부담감을 느꼈다면 결론은 뻔하지 않은가. 이런 사안에조차 주춤거린다면 단언하건대 대한민국 사법부의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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