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영동 영국사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제223호> 1970년 4월24일 지정
23. 영동 영국사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제223호> 1970년 4월24일 지정
  • 연숙자 기자
  • 승인 2008.11.06 22: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충청의 천연기념물 그 천혜의 비상
충북 영동군 양산면 천태산 자락에 위치한 영국사 은행나무.
1000년 세월 딛고선 거대한 풍채 장관

높이 31.4m·둘레 11.54m 거목
"나라에 큰 변고 있을때마다 울어"


연숙자기자 · 생태교육연구소 터


영국사 은행나무는 충북 영동군 양산면 천태산 자락에 있다. 수령은 10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31.4m, 가슴높이 둘레 11.54m 가량된다. 사찰의 역사와 함께한 나무는 사방으로 가지를 뻗어 자라고 있고, 서쪽가지
31.4m의 높이에 사람이 왜소해 보인다.
하나가 땅에 뿌리를 내려 원줄기와 함께 커다란 수형을 이룬다.

가을이면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 엄부렁 덤부렁 이어진 길을 따라 노란 가을이 열리는 영국사다. 영동의 양산팔경 제1경으로 꼽힐 만큼 유명한 이곳은 사찰보다 주변의 경관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천태산과 천 년의 세월을 품고 서 있는 천연기념물 은행나무 때문이다.

영국사로 가려면 주차장에서 1km 남짓 산길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오솔길처럼 아기자기하게 이어진 산길은 계곡과 바위가 어우러져 비경을 연출한다. 또한 널적한 바위 위로 흐르는 삼단폭포는 가을 산 빛을 가르며 떨어지는 흰 물줄기로 발길을 멈추게 한다. 그렇게 단풍에 취해 고갯마루를 넘으면 천태산을 등지고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가 먼발치에도 한눈에 들어온다. 초록 속에 묻혀 잘 보이지 않던 은행나무는 가을이 되어야 비로소 확연한 제모습을 드러내며 노란 융단을 깔아 부처의 세계로 안내한다.

옴팡하게 들어갔다 올라가며 이어진 영국사 가는 길은 마음을 다잡으란 일주문도, 잡귀를 몰아내는 사천왕문도 없다. 사바와 극락의 경계에서 사람들의 소원 소지가 금줄에 걸려 형형색색으로 나부끼고, 천 년의 세월동안 한결같은 마음으로 불법을 수호해온 은행나무가 있을 뿐이다. '부처가 따로 없다'말처럼 은행나무는 이미 부처였다.

그 길에서 천 년의 은행나무를 만났다. 가지를 벌려 하늘로 향한 모습은 제사장의 모습처럼 경건하기도 하고, 가지마다 달려있는 노란 열매들은 인고의 세월을 품어 삭혀낸 진신사리 같게도 느껴진다. 멀리서 볼 땐 노란 깃대처럼 보이던 나무는 큰 품으로 천 년의 말을 잎으로 열매로 피워내고 있었다.
커다란 밑동이 천년의 역사를 말해준다.

거목 앞에 서니 상대적으로 왜소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주변을 다 덮고도 남을 나무그늘은 수평을 이루며 하늘마저 노랗게 물들이고 있었다. 다른 천연기념물에 비해 크게 부러지거나 다친 흔적이 적은 나무는 옴팡한 지형과 병풍처럼 바람막이가 되어준 천태산 덕분에 천 년의 세월도 비켜가지 않았나 싶었다.

"나라의 큰 변고나 천재지변이 일어날 때마다 나무가 울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고 들려주는 스님은 "공민왕이 이곳에 피신했을 때도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 때도 나무가 울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고 설명했다. 또 "천 년의 세월을 훌쩍 넘어선 은행나무와 영국사는 동반자적 삶을 살아왔다고 봐야 할 것"이라며 "깨달음이란 때론 침묵으로 얻어지는 감동이지 않겠냐"며 은행나무로 시선을 옮겼다.

침묵의 시간이 노란 그늘 속에 스며들어 갔다. 한자리에서 천 년을 하루같이 살아온 은행나무가 두툼한 시간의 나이테를 둥글게 가슴에 새기는 동안, 찰나로 돌아갈 사람의 자리에는 뚝 뚝 은행알이 떨어진다.
영국사 만세루

◈ 오랜 역사 만큼이나 여전히 베일

천년 고찰 영국사는?

산사태로 자연폐사… 발굴조사서 각종 유물 출토


영국사는 산사태가 나면서 집채만한 바위가 대웅전으로 떨어져 폐사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2003년 영국사 일대를 발굴조사하면서 대웅전 자리에 있던 바위를 쪼개 포크레인으로 들어내고 조사했어요"

2003년 영국사 발굴조사에 나선 장준식 충청대학박물관 관장은 영국사가 산사태로 자연폐사되었다고 말한다. 또 "원각국사와 대각국사 의천이 동문수학한 점과 남북한의 천태종을 연계해 볼때 당시 천태종의 본사는 지금의 구인사가 아니라 영국사의 가능성이 높다"며 고찰의 의미를 설명했다.

"영국사 발굴조사에서 금동여래입상 2점과 소조부도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는 장 관장은 "부처님 손바닥에 올려 놓는 소조부도는 국내 최초로 출토된 귀중한 자료"라고 밝혔다.

오랜 역사 속에 아직도 베일에 쌓여 있는 영국사는 천년의 파고를 이겨내고 천태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 문종 때 대각국사가 국청사라 했던 것을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이곳에서 나라의 안녕을 기원한 후 안정을 되찾았다 하여 영국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사찰로 접어들면 입구에서 만해루 누각을 만나게 된다. 만해루 아랫길을 지나며 조금씩 비쳐지는 대웅전과 삼층석탑은 서민적 소박함과 단아함이 그대로 전해진다. 크고 웅장하거나 아름다움을 드러낸 사찰과는 전혀 다른 모습에서 천년 사찰의 고풍스런 멋이 자연스럽게 배어나온다. 고즈넉함을 채우듯 마당을 한켠에 자란 보리수나무가 돋보이는 것도 영국사만의 매력이다.

사찰 건물이 대웅전을 중심으로 점차 늘어나는 추세지만 고찰의 풍경은 아직 곳곳에 남아있다. 사찰 주변에는 중요문화재 부도(보물 제532호)와 3층석탑(보물 제533호), 원각국사비(보물 제534호), 망탑봉3층석탑(보물 제535호) 등 문화재가 산재해 있어 역사의 현장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