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의 동쪽과 독일의 정신
에덴의 동쪽과 독일의 정신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10.24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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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정 규 호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미니시리즈 '에덴의 동쪽'이 인기리에 방송되고 있다. 1980년대쯤을 배경으로 엇갈린 운명을 다루고 있는 이 드라마는 요즘 보기 드문 진한 가족애가 그 바탕을 이룬다.

'에덴의 동쪽'은 '야망의 세월'(1989)을 비롯해 '달동네'(1980), '보통사람들'(1982) 등을 쓴 중견 방송작가 나연숙이 극본을 맡아 방송 전부터 화제를 모으더니 줄곧 괜찮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

이 드라마는 처음부터 엇갈린 운명을 시청자에게 드러낸 상태에서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다. 한 남자에게서 버림받은 여자, 더군다나 독재의 서슬이 시퍼런 시대상황에서 궁핍하게 택한 여자의 '아이 바꿔치기'라는 상상하기 쉽지 않은 상황을 이 드라마는 먼저 제시한다.

말하자면 원인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시청자들에게 야망의 질곡과 가족애, 엇갈린 운명 등의 이야기 뼈대에 대한 관찰자적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극적 긴장감을 유지하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대개 이 경우보다 절묘한 복선과 갈등구조 등 복잡한 플롯을 통해 시청자들이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의 줄거리를 쉽게 눈치 채지 못하게 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드라마 '에덴의 동쪽'의 흥미진진함이나 궁금한 결말 따위는 아니다. 다만 이 드라마 중간쯤부터 신데렐라와 같이 등장한 한 운명의 여인의 궤적이 작금의 우리 경제 상황과 묘하게 오버랩된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다. 극중 간호사의 역할을 맡았던 이 여인은 남자에게 버림받은 뒤 타오르는 증오심으로 같은 날 태어난 두 아기를 뒤바꿔놓고 홀연하게 그 마을에서 사라진다.

이 여인은 당시의 시대상황에 따라 당연하듯 '독일'로 갔고, 그곳에서 어찌어찌하다 운명적으로 거물 경제인을 만나게 되며 그 후광을 입어선지 세계적인 로비스트가 되어 금의환향한다.

나는 드라마의 이 대목에 이르러 뜬금없이 지금의 한국경제를 생각한다.

독일! 이 나라는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시금석이었던가. 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에서 비롯된 폐허를 딛고 일어선 그 나라의 저력을 우리는 '라인강의 기적'이라며 얼마나 부러워했고, 또 얼마나 금과옥조로 삼았던가.

간호사와 광부 인력을 수출하며, 그들의 피와 눈물로 범벅이 된 소중한 외화를 토대로 선반이나 밀링머신 등 지금은 그 이름에 대한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공작기계를 사들여 우리도 '하면 된다'는 다부진 각오를 했음이 결국 지금 우리가 이나마도 살게 된 밑거름이 아닌가.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아(A), 베(B), 체(C), 데(D), 에(E), 에프(F), 게(G)"와 "이히 리베 디히(Ich liebe dich)" 정도로만 남아있는 독일어에 대한 가물가물함 만큼이나 우리는 변했다. 그 사이 우리의 관심은 온통 '미국'으로 쏠렸고, '미국'에 대한 의존이 경제는 물론이거니와 정치와 경제, 교육에 이르기까지 집중되면서 심지어 영어몰입교육이라는 세태를 만들고 있다. 그 배경을 일일이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그 사이 헐리웃은 우리의 문화적 감성을 지배하고, 달러는 국가경제의 지표처럼 돼버렸으며, 미국의 재채기에 우리는 몸살을 앓을 정도로 허약해진 것은 아닌지.

그 당시 나름대로 소중했던 독일에 대한 기억과 결코 잊어서는 안될 이역만리 타국 땅에서의 서글픔과 그 처연한 이주노동의 역사를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또렷이 목격하고 있다.

어렵다, 어렵다는 말이 습관처럼 반복된다. 먹고살기 힘든 경제 상황에서 쌀 직불금은 들녘의 농심을 황금빛이 아닌 누렇게 뜬 빛깔로 바꿔놓고 말았다.

드라마 '에덴의 동쪽'을 보면서 독일과 그들의 근면 검약이 새삼스러운 건 그래도 그런 '처음처럼'의 자세를 통해 우리라도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회한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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