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고려 초조대장경 소장 교토 남선사
<8> 고려 초조대장경 소장 교토 남선사
  • 한인섭 기자
  • 승인 2008.10.13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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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임진왜란은 활자전쟁이었나
남선사 본당으로 향하는 곳에 설치된 삼문(三門). 남선사 삼문은 天下龍門이라고 불리며 상층누각은 오봉루(五鳳樓)라고 한다.

고려시대 초조대장경 1800여권 소장

1400∼1429년 원나라판 부족분 채워 일체경 완성

日 "외교적 노력 통해 입수"… 국내 강제반출설 부인

교토(京都) 남선사(南禪寺·난젠지)는 고려시대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 1800여권을 소장하고 있는 사찰이다.

중국 북송시대 개보대장경(開寶大藏經)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제작된 초조대장경은 원래 5000여권의 방대한 분량이었지만, 몽고 침략 때 대부분 파괴돼 기록상으로만 전해지다 일본 남선사가 소장하고 있는 것이 알려져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게 됐다.

고려 초조대장경은 국내 소장본은 300여권에 불과해 1∼2권만 새로 발권되더라도 국보로 지정할 만한 가치를 지닌 유물이다. 초조대장경은 남선사와 일본 대마도 역사문화박물관이 600여권을 소장하고 있는 등 국내보다 일본이 더 많은 분량을 갖고 있다.남선사 서보전(瑞寶展)에 있는 일체경은 원래 이 절 말사(末寺)중의 하나였던 기후현(岐阜縣) 선창사(禪昌寺·젼쇼지)가 소장했던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사후 권력이 재편되면서 일체경에 눈독을 들이는 권력자들이 생기자 선창사 승려들은 타 종단에 빼앗기는 것을 우려해 말사보다 본사가 소장해야 안전할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선창사 콘치니(金地院)와 수우덴(崇傳)은 도쿠가와 이에야쓰의 승인을 얻은 후 혼슈 지방 내륙에 있던 선창사에서 교토 남선사로 일체경을 이전했다.

선창사와 남선사 기록에는 1614년 1월 26일 일체경을 배에 실어 교토 인근까지 옮긴 후 다시 수레를 이용해 육로로 옮겨 2월 5일 남선사에 일체경이 도착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남선사로 옮겨지기 이전 일체경을 완성해 소장했던 선창사는 광엄천황(光嚴天皇·1313∼1364년)의 칙명으로 창건된 사찰이다. 이 사찰 기록에 의하면 창건 당시 주지였던 월암선사(月菴禪師) 제자 무견화상(無見)은 스승을 대신해 중국에 건너가 일체경을 모으다 1393년 또는 1407년쯤 현지에서 사망했다는 내용이 전해져 이 당시부터 중국과 한반도의 불경을 모으는 일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선창사 기록에는 경안대사(慶安大師·사미케이안)가 불경을 모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는 불법을 넓혀 사은(四恩·부모 중생 국왕 삼보)에 보답하기 위해 불경을 모았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일체경이 소장된 남선사 서보전

일본 학계는 이같은 일련의 기록을 종합해 월암선사의 제자이자, 무견화상의 일체경 채집을 도왔던 경안대사가 일체경을 완성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남선사가 발행한 '일체경관계지도(一切經關係地圖)'에는 고려 개성 부인사(符仁寺)와 가야산(伽耶山) 해인사에서 각각 수집했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이 기록에는 초조대장경 출판 시점이 부인사판은 11세기, 해인사판은 13세기로 나와 있다.

일본은 경안대사가 고려 초조대장경을 외교적 노력 끝에 입수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 선창사 주지 곤도 도시히로(近藤利弘) 스님은 지난해 11월 고려대장경 연구소와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공동주최로 열린 워크숍 발제문 '일체경의 유래'를 통해 이같은 사실을 발표했다.

곤도 스님은 당시 "선창사 에도시대 기록을 종합하면 고려말에서 조선초기였던 1400년부터 1429년 사이 중국과 고려, 조선에서 원나라판 부족분을 채워 일체경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며 "일체경에 들어있는 지도를 보면 중국 익주, 성도와 복주 동선사각원, 개원사, 항주 만산보령원, 고려 부인사 등에서 제작된 것을 가져왔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고 밝혔다.

국내 학계는 임진왜란과 일제침략기에 강제 반출됐을 것으로 보던 것이 일반적이었던 상태여서 곤도의 발표는 상당한 주목을 끌었다.

고려대장경연구소 관계자는 "남선사에 초조대장경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 초조대장경이 임진왜란이나 일제하에서 일본으로 반출됐을 것이라는 게 학계 시각이었다"며 "곤도 도시히로 주지가 선창사 기록을 제시하며 경로를 밝혀 정상적인 절차를 거쳐 전해졌을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 韓·中·日 목판 대장경 박물관

인터뷰 / 후등헌웅(後藤憲雄)남선사 총무총장

"중국 송나라판 대장경과 원나라판 대장경, 고려 초조대장경, 일본 대장경(사경)을 합친 일체경(一切經·일종의 불교사전)을 비롯해 1300년대 이전에 제작된 대장경을 모두 보유하고 있습니다. 남선사가 일체경을 완성한 당시에는 문헌의 보고(寶庫)였다 할 수 있지요."

後藤憲雄 남선사 총무총장(사진)은 남선사가 소장하고 있는 대장경 가치를 이렇게 설명하고 "목판 대장경의 박물관이나 마찬가지"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고려에서 가져온 초조대장경은 1392년 남선사로 옮겨지기 이전 선창사의 경안 스님이 왕실이나 사찰에 요청하는 방식 등 정상적인 외교 루트를 통해 확보한 것으로 안다"며 "종교적으로나 학술적으로 매우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밝혔다.

後藤憲雄 총무총장은 이어 "일본은 중국과 한국에서 먼저 만들어진 대장경을 소중한 가치로 받아들여 잘 배웠고, 부족했던 것은 추가로 만들어 일체경을 형성했다"며 "남선사는 한·중·일 유물을 모두 간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일본은 중요문화재로 지정해 유물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며 "한국의 문화관광부 지원으로 고려대장경연구소가 추진 중인 초조대장경 디지털화 사업이 잘 마무리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그는 또 "고려대장경 연구소가 2011년까지 추진할 디지털화 사업이 잘 마무리될 때까지 적극 돕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後藤憲雄 총무총장은 "남선사는 불경 외에도 가마쿠라 시대부터 천황들이 선원을 짓고, 임시거처로 사용하는 등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고 설명하고 "선인들의 지혜를 배우고, 후손들에게 잘 전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일체경을 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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