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위해 목숨을 다하다-충렬사
나라를 위해 목숨을 다하다-충렬사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9.11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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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체험 문화답사기
한 윤 경 <역사논술 지도교사>

이제 곧 추석입니다. 점점 사라져가고 있지만, 강강술래는 떠오르는 보름달을 아래서 달집을 태우며 주위를 빙빙 도는 추석놀이 중 하나지요.

강강술래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명량 앞바다에서 왜적을 무찌를 때 적은 군사로 도저히 왜군과 맞서기 어렵게 되자 아낙네들을 모아 수십 명씩 무리를 지어 산봉우리를 돌게 하여, 멀리 떨어져 있는 왜적에게 마치 수만의 대군이 산봉우리를 내려오는 것처럼 보이게 하여 왜적을 물리쳤다고 해서 유래했지요.

이순신과 같은 훌륭한 분들이 많았기에 일본군들을 조선에서 물러나게 할 수 있었지요. 천곡 송상현도 그중 한분인데요. 청주 가로수 길 옆으로 있는 수의동에는 이분의 사당인 충렬사가 있지요. 송상현의 시호는 충렬로 조선 선조 9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동래부사가 되었어요.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왜군이 동래성에 다다르자 군사를 이끌고 끝까지 항전하였죠. 이 전투에서 왜병이 "싸우고 싶거든 싸우고 그렇지 않으면 길을 빌려 달라"고 회유하였지만 송상현은 "싸워서 죽는 것은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고 답하여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굳은 의지를 보였지요. 군사력이 왜군에게 뒤져 싸움이 형편없이 밀려 승산이 없었지만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어요.

당시 20만 명의 왜적이 부산 앞바다에 상륙하였고, 부산과 동래성에서 정 발, 송상현 등이 왜군의 조총에 맞서 용감히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말았어요. 결국 치열한 공방 끝에 성이 함락되자 송상현은 단정히 조복을 갈아입고는 임금이 계신 북쪽을 향해 절을 한 후 죽음을 기다리며, 한성에 계신 부모님께 당시의 상황과 심정을 시로 표현하여 부채에 적어 보냈어요.

'외로운 성은 달무리처럼 포위되었는데 이웃한 여러 진에서는 도와줄 기척도 없습니다. 임금과 신하의 의리가 무거우니 부자의 온정은 가벼이 하오리다' 하는 혈서를 써 부모님께 보내고 순절하셨지요.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은 충은 되지만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은 가장 큰 불효임을 알았음에도 대의를 따랐던 것이지요. 결국 자신의 직분에 충실했던 송상현의 죽음은 불효가 아니라 '진정한 효'였던 것이에요.

청주는 충렬공 송상현이 태어나신 곳도 아니며, 돌아가신 곳도 아니에요. 그런데도 충렬공을 모시는 사당이 이곳에 있는 이유는 사당 뒤쪽에 있는 충렬공의 무덤 때문이지요. 충렬공은 당시 동래성을 함락시킨 왜장이 피신을 권유했지만 단호히 거절하고 순절하셨다고 해요. 왜장은 이에 감복하여 정중히 장례를 모셨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요. 무덤을 청주로 옮길 때도 동래가 왜적의 점령지였지만 오히려 왜장이 이장을 적극 협조하였다고 해요. 비록 적일 망정 충렬공의 굳은 기개를 높이 샀던 거죠.

사실 청주에서는 그동안 송상현 충렬사가 중요도에 비해 시민들에게 알려지지 않아서 후손인 여산 송씨 문중과 더불어 시에서 성역화 작업을 추진하여 훌륭한 교육의 장으로 새로운 사당과 기념관이 문을 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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