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합천 가야 해인사 ①
경남 합천 가야 해인사 ①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9.11 22: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해설이 있는 송부일의 문화재 돋보기


절경따라 흐르는 청정계류에 마음을 씻다

신라 애장왕때 순웅·이정 선사 창건
팔만대장경판 보존… '호국신앙 도량'

송 부 일

홍류동계곡은 가야산 국립공원 입구에서 해인사까지 이르는 4km 계곡으로 가을 단풍이 너무 붉어서 물이 붉게 보인다고 하여 이름 붙여졌다.
해인사를 찾아 홍류동 계곡에 왔다. 홍류동은 단풍이 옥같이 맑은 물에 붉게 비치고 떨어진 단풍잎이 물과 함께 흐른다하여 홍류동이라고 불렀다 한다. 절경의 이 계곡에 신라의 학자 최치원이 찾아와 바위에 시를 지어 음각한 것을 탁본하여 옆 계류 언덕에 있는 농산정 정자에 올라 읊으니 자칫 선비요, 시인 같은 기분이 든다.

미친 듯 바위에 부딪는 물
산봉우리를 외치게 하니
사람 말소리 지척에서 듣기 어렵네
항상 시비하는 말
귀에 닿을 가 보아
흐르는 물소리로
산을 다 감싸 놓았는가

시를 읽으니 물소리마저 옛 시인을 그리워하는 배경 음악 소리와 어우러지는 듯하다.

계곡에 바위들이 많은데 사람들이 바위마다 낙서로 음각을 해 놓아 자연을 훼손한 것 같아 해인사를 찾는 사람들을 기분 상하게 한다.

해인사는 해인 삼매의 이름으로 바다 가운데 온갖 사물들의 그림자가 거울처럼 비추듯이 부처님의 지혜바다에 만법이 나타남을 해인삼매라 하는데 여기서 따온 이름이라고 한다.

해인사는 신라 애장왕 때 순웅, 이정 두 조사가 중국 양조시절 보지공 선사가 임종하며 그의 제자들에게 "신라에서 두 스님이 법을 구하러 올 것이니 동국답산기를 전해 주라"는 유언을 남기고 열반하였다 한다.

그로부터 삼백 년 지나 순웅, 이정이 당나라에 와 그의 제자에게 책을 전해 받고 보지공 선사의 묘에 찾아가 구도를 간청하니 묘문이 열리며 공이 나와 "우두산에 가면 불법이 크게 일어나리라" 이르고 사라졌다고 한다.

두 선사가 신라에 돌아와 우두산(가야산)에 초막을 짓고 선정에 들었다. 그때 애장왕 왕후가 등창이 나서 고명한 스님을 전국 사찰에서 찾던 중에 가야산 산정에서 서광이 비쳤다.

이 사실을 왕이 알고 두 분 조사를 모시려 하였지만 가기를 거부하고 오색실을 주면서 실의 한 끝을 궁 앞 배나무에 매고 한 끝은 등창 난 곳에 대면 낳으리라 하였다.

조사가 가르쳐 준 대로 하니 병은 깨끗이 낫고 배나무는 말라 죽었다.

이에 감동한 왕이 신라의 원당으로 삼고 전답 2500결을 하사하여 해인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순웅, 이정의 뒤를 이어 결언대덕이 주지가 되고 그 후 주지 희랑대사가 후백제 견훤의 당부를 뿌리치고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주어 고마움에 국찰로 삼아 주어 해동 제일 도장이 되었다.

조선 태조7년에 강화 선원사에 있던 팔만대장경판을 지천사로 옮겼다가 해인사로 옮겨 호국 신앙의 도량이 되었다.
성철 스님 부도비

흘러 간 해인사를 생각하며 오르니 성철 스님의 부도가 현대식 부도로 자리를 크게 차지하고 있다.

여기에서 오르면 사적비, 송덕비, 옛 스님들의 부도비가 서있는 비거리로 그 옆에 높이 3m쯤 되는 보물 제1242호인 묘길상탑이 서있다.

그냥 길상탑이라고도 부르는 이 탑은 이중기단에 3층 탑신을 얹고 다섯 단의 처마받침을 한 전형적 신라 탑이다.
보물 제1242호 묘길상탑

이 탑은 다른 탑과는 달리 법당 앞에 서있지 않고 사람들이 오가는 길가에 서있는 일종의 기념탑, 위령탑으로 알려져 있다.

1966년 이 탑에 안치되었던 지석 4매와 157개의 흙으로 구운 조그마한 탑을 훔친 도굴꾼들이 검거되어 묘길상탑의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 중 탑지 4매는 규격과 재질이 같으며 크기는 가로, 세로가 23cm에 두께가 2.5Cm로 벽돌 모양의 흙으로 구어 만든 일종의 전탑이다. 그중 두 장은 앞뒤에 글씨가 새겨져 있고 두 장은 한 면에만 음각되어 있다.

첫 번 지석 앞면에 '해인사묘길상탑비', 뒷면에는 '운양대길상탑기'에 새겨져 있는데 최치원의 글로 진성여왕 때 전란으로 인해 사망한 원혼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3층 석탑을 세웠다는 내용의 글이다. 운양대길상탑기는 탑의 높이, 소요 자재와 경비, 공사 관련 인물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두 번째 지석은 길상탑 안에 공양물을 봉안하려던 불경 목록이 적혀 있다.

세 번째는 지석에는 해인사묘길상탑기 같은 취지로 오대산사에 길상사를 세우게 된 내력을 4자씩 떨어진 운문으로 기록하고 전몰한 승려들에게 조사 "승병을 애도함 "의 제목이 실려 있다.

네 번째는 전란 중 해인사에서 사망한 승려와 일반인 56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도벌꾼에게 잃었다가 다시 찾은 4매의 탑 공양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해인사 응진전.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