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 아빠 198만명 시대
백수 아빠 198만명 시대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6.17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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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한 덕 현 <편집국장>

직업이 없는 이른바 '백수 가장'이 전국적으로 198만명이나 된다는 통계발표가 있었다. 통계수치의 허구를 감안한다고 해도 결코 예사롭지 않은 현상이다.

이를 풀어서 해석하면 가정을 책임져야 할 우리나라 기혼 남성 10명중 1.6명이 백수라는 것이다. 내 친구들이나 내 주변의 가장들 중에 거의 20% 정도가 직업이 없다고 생각하면 더 실감난다. 경제가 워낙 어려운 것도 원인이겠지만 40, 50대 심지어 30대까지 명퇴나 구조조정 바람에 휩싸이는 현실에 기인하는 측면이 클 것이다.

이런 보도를 접하고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그런 가장들이 처했을 지금의 상황이다. 개중에는 부모를 잘 만났거나 혹은 젊어서 많은 돈을 벌어 평생 먹고 살 걱정없이 무직(無職)을 천직으로 삼아 빈둥빈둥 호의호식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하루가 시작되는 아침이 두려운 서민 가장들일 것이다. 설령 돈 잘버는 능력있는 부인을 만나 집에서 대신 살림하는 경우에도 그 박탈감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이 쇠고기협상이니 한반도 대운하니 하며 사회구성원간 이기와 명분싸움에 올인하는 사이에 정작 그 사회를 지탱하는 가정은 소리소문없이 망가지거나 무너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제 아무리 사회, 경제적 지표가 긍정적으로 나온다고 해도(현실은 그렇지도 않지만) 가정의 백수 아빠가 이 정도로 많다면 미래는 암담하다.

우리사회가 과거의 전통적 가치와 비교, 지금은 엄청나게 변했어도 한 가정에서의 가장의 부실은 여전히 심각한 문제를 수반한다. 이런 현상이 장기화될 경우 가정의 해체는 불가피하다. 그렇게 되기 전이라도 문제의 백수 가장들이 겪어야 하는 정신적 고통은 또 어떤가. 가족과의 대화가 끊기고 그것이 곧바로 상실감으로 엄습해 지금쯤 산이나 공원으로 무작정 돌아다니며 시간을 죽이는 고행을 자처할지도 모른다. 힘들어도 겉으로는 내색할 수 없는 가장의 숙명을 곱씹으면서 말이다.

몇년전 '아버지'라는 제목의 소설(김정현 작)이 숱한 사람들의 눈물샘을 자극한 적이 있다. 평범한 50대 중년의 남자가 졸지에 췌장암의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후 빚어지는 가족간의 이야기로서 얼핏 신파극의 냄새가 물씬 나는 별볼일 없는 작품이지만 당시 노숙자 양산 등 IMF 사태에 따른 가정해체가 극심하던 사회적 분위기와 맞물려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가족 부양에 대한 사명감으로 오직 직장과 일에만 매달리며 부인과 딸로부터 살가운 소리 한번 못 듣다가 결국 5개월 시한부 인생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선고를 받고도 "가족에겐 절대 알리지 말라"면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려는 그 주인공의 삶이 너무 한스럽게 공감됐기 때문이다.

가족들은 죽음에 임박해서야 이런 사실을 알고 다시 아빠의 존재에 대해 뼈저린 자각을 하게 되지만 이미 때는 늦은 것, 주인공은 끝내 딸아이에게 미리 쓴 유서를 남긴채 장기기증과 함께 편안한 죽음을 맞이한다.

지금 198만명에 달한다는 백수 가장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국가의 실업정책도 아니고 주변의 일시적인 금전적 도움도 아니다. 어차피 현재의 역경을 근본적으로 극복하기 위해선 본인의 재기 밖에 없다. 그럴러면 지금 처해있는 상황에 대해서도 자신감을 가져야 하며 그 결정적 단초는 바로 가족의 따뜻한 위로다. "왜 직장을 구하지 못하느냐"는 책망보다는 "지금 우리 뿐만 아니라 다들 어렵대요" 이 한마디면 백수 가장들은 반드시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아침 출근시간마다 잠깐 짬을 내 걷는 사무실 인근의 공원에서 늘 만나는 사람이 있다. 40대 중반 쯤의 남성인데 항상 수심으로 가득찬 표정이다. 그가 놀이기구에 걸터앉아 가슴 깊숙하게 담배연기를 빨아들이는 모습이 아닌, 씩씩하게 활보하는 모습을 조만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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