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중(multitude)의 출현
다중(multitude)의 출현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6.02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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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김 승 환 <충북민교협 회장>

출범 100일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이명박 정권이 이렇게 처참하게 무너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래도 1년은 갈 것으로 예상했다. 지난해 가을 충북의 시민민중단체는 "우파의 보수주의는 오래가지 못한다. 한나라당이 집권하더라도 경제, 교육, 외교, 양극화, 균형발전, 계급갈등, 남북문제 등 제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머지않아서 국민들의 기대가 낙망으로 바뀌는 것과 동시에 한나라당의 실정(失政)이 거듭될 것"을 예상했다. 그런데 1년으로 보았던 이 예상은 빗나가서 단 세달만에 식물정권(植物政權)의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는 점에서 진보개혁진영의 당혹감은 결코 수구보수에 못지않다. 그 이유는 이렇다.

진정한 보수주의 정권은 진보 진영에도 이롭다. 새가 좌우의 날개로 날듯이 진보와 보수가 교차하여 정권을 장악하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그러자면 보수가 안정성을 가지고 지속가능하면서 예측가능하게 정치세력화 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진보 역시 안정성을 가지고 지속가능하고 예측가능하게 국가와 사회를 밝고 건강하게 만들 수 있다. 물론 한국에 진정한 보수, 진정한 진보가 정치화되지 않았다는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런 점에서 진보진영은 이명박 정권이 진정한 보수 정권이 되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은 보수가 아니었다. 보수를 표방한 어설픈 장사꾼 집단이었던 것이다.

보수 논객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이른바 광우병 저항은 반미운동의 성격이 있다. 그리고 진보진영의 전략전술이 성공한 것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미국산 쇠고기를 먹더라도 광우병에 걸릴 확률이 번개에 맞을 확률보다 낮다는 것도 과학적인 사실이다. 이렇게만 보면 이번 사안은 국민건강과 주권(主權)의 문제인 동시에 반제투쟁이고 반미운동이며 좌파의 전복적 전략인 동시에 비과학적인 선전선동이다. 보수 논객들은 바로 이런 시각을 바탕으로 좌파가 배후를 조종하여 어린 학생들과 시민들이 동원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들의 그런 희망을 무참히 깨뜨리는 현상이 발생했다.

그것이 바로 다중의 출현이다. 광우병 시위에서 가장 중요한 본질이 바로 다중의 출현이다. 이들은 민중단체와 시민단체를 밀어내고 자기 스스로를 역사의 주체로 설정했다. 안토니오 네그리가 창안한 용어인 다중(multitude)은 하나의 정체성을 넘어서서 가로지르며 질주하는 세력이다. 조직화되지 않고 자유분방하면서도 자발성과 자율성을 가진 독자적 주체가 바로 다중이다. 이 다중들은 누구의 지시를 받거나 누구에게 지시를 하거나 하지 않고, 스스로의 판단과 결정에 의하여 움직인다.

이들 다중의 이합집산(離合集散)은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인류인 인터넷 노마드(internet nomad)적 성격이 있다. 이들이 바로 이번 광우병 사태의 주인공들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진보진영이나 시위 지도부가 이들을 통제할 수 없는 것이다.

광우병 사태에서 시민단체들은 역사의 중심에 있지 못했다. 시민단체가 전문성과 합법성을 고려하면서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사이에 민중단체들이 본질을 직시하고 현장저항을 통하여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민중단체 역시 이 다중들의 자율성 때문에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따라서 이 국민저항은 실제적으로는 진보진영의 기획이자 전략이기는 하지만 현상적으로는 자발적 다중들이 역사의 전면에서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 형국이다.

한국 사회에서 다중이 출현했다는 것은 여러가지 의미가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진정한 민주사회로 가는 청신호라는 점이다. 따라서 이번 사태는 민족주의의 과잉으로 읽히기도 하지만 다중이 출현함으로써 역사적 주체가 교체되었다는 사실을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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