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긋기
선 긋기
  • 연서진 시인
  • 승인 2024.04.17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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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연서진 시인
연서진 시인

 

서둘러야 했다. 부랴부랴 집안일을 끝내고 노트북 앞에 앉았다.

아홉 시가 되려면 조금 멀었지만 모집 공고문은 미리 올라와 있었다. 이미 접수한 사람도 있었다. 지인에게 바삐 카톡을 보냈다. `공고 떴어요. 빨리 접수하세요.'

기다리던 첫 수업이 시작됐다. 8절 도화지를 8칸으로 나누고 칸마다 자유롭게 그리되, 선으로 명암을 표현하는 시간이다.

그저 단순히 줄 긋는 것인데 어려워도 그렇게 어려울 수 없다. 길지도 않은 고작 5~6센티의 선을 노려보듯 뚫어지게 쳐다보며 한 줄 한 줄 긋고 또 그었다. 삐뚤대고 간격도 일정하지 않은 게 도무지 생각처럼 되질 않는다. 대부분 첫 수업은 수월하던데 도무지 쉽지 않은 소묘 첫 수업이다.

그림의 기초인 선 긋기, 기초를 쉽게 생각했나 보다. 손쉽게 보이는 줄 하나 긋는 게 이리 어려울 줄이야. 집으로 돌아와 학습관에서 했던 선 긋기를 다시 보았다. 일정한 선은 아니더라도 어쩜 이리 제각각인지 웃음이 다 나온다. 강의실에서 보았던 사람들의 쓱쓱 경쾌하게 연필 오가는 소리가 부럽다.

집으로 돌아와 스케치북을 펼치고 여백을 나누어 선 긋기 시작했다. 지그재그 선이 되지 않게 해야 하고 시작점과 끝 선이 같은 텐션이 되게끔 유지해야 한다. 사각을 벗어나지 않게 선을 긋는 건 정말 어렵다. 첫 점에서의 평정심을 끝까지 유지해야 올바른 선이 나와야 좋은 그림이 되는 것이 내가 하는 미용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미용을 배울 때의 일이다. 남자 커트를 하다 드디어 여자 머리를 할 수 있는 다음 단계로 올라섰다. 첫날, 어찌나 떨리던지 설렘 반 걱정 반으로 한동안 밤을 설쳤다. 순조롭게 시간은 흘렀고 오후에 방문한 여학생의 단발머리를 자를 때였다. 단순하니 쉽게 끝낼 수 있다는 생각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머릿결도, 사각사각 가위소리도 시작의 느낌이 좋았다. 그러나 끝내고 거울을 보니 어딘가 이상했다. 앞선이 맞지 않았고 뒷선도 바르게 자른다고 했는데 떨어져서 보니 약간 둥근 곡선으로 보였다. 다시 자르고 봐도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순간 당황했고 결국 원장님 손을 빌려야 했다. 후에 왜 잘못됐는지 질문하니, 여학생 귀의 높낮이가 다르고 두껍고 매직을 한 직모여서 조금만 엇나가도 가위가 지난 선이 다 보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날 이후부터 단발머리를 커트할 때 좀 더 신중하게 자르는 습관이 생겼다. 사람의 얼굴 모양이 각기 다르듯이 작은 선 하나가 균형을 맞추기도 무너트리기도 하니 허투루 해야 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게 뭐야, 그림 그리는 거 아니야?” 남편은 궁금한지 슬쩍 넘겨 보았다. 스케치북에 선만 그어진 걸 보더니 도대체 하루 종일 그림은 그리지 않고 뭘 하는 거냐고 묻는다. 기초인 선 긋기가 안돼 연습 중이라고 하니 그러다 화가가 되겠다며 웃는다.

대부분 내가 긋는 선은 네모난 사각 틀을 벗어난다. 마음을 다잡아도 많은 연습 없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선 긋기다.

기술도, 학업도 모든 일에 기초가 기반이 되어야 성장할 수 있으니 그만큼 기초는 튼실해야 하는 것이 맞다. 아직은 기초가 서툰 나의 선 긋기, 한 줄 한 줄 조심스럽게 스케치북의 여백을 채우는 지금 그저 따스한 화풍으로 완성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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