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남긴 충북 문화유산의 과거
일제가 남긴 충북 문화유산의 과거
  • 이윤용 충북도문화재연구원 중원학연구팀 주임연구원
  • 승인 2024.04.28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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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의 문화유산 이야기
이윤용 충북도문화재연구원 중원학연구팀 주임연구원
이윤용 충북도문화재연구원 중원학연구팀 주임연구원

 

19세기 이후 조선은 외세의 침입으로 인해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이었다. 많은 열강들 가운데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점차 강화해갔고, 결국 1910년 8월 29일 조선을 병합한다. 그 이후 우리나라는 굴하지 않고 일제의 수탈 속에서 광복을 위해 노력하였고, 결국 1945년 8월 15일 광복하였다. 광복 이후 우리나라는 ‘한강의 기적’을 보여주었고 현재는 선진국의 반열에 오를 정도로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다. 또한, 문화적으로 한류열풍을 일으키며, 김구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문화강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가고 있다.



일반적으로 “문화”라고 하면 음악, 영화, 문학 등을 이야기하지만, 필자는 고고학이라는 전공때문에 문화유산이 먼저 떠오른다. 전공 공부를 하면서 일제강점기라는 아픈 역사 속에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파괴되고 사라진 사실에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시기 일본인들이 조사한 문화유산에 대한 자료가 지금 우리에게는 소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어 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일제의 한국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은 1883년 일본 육군 참모본부 소속 군인인 사코 가게아키(酒勾景信)가 광개토왕비의 탁본을 소개하면서 가속화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관심은 문화유산에 대한 순수한 학술적 조사가 아닌 경제적 이득을 위한 도굴, 약탈 등으로 변질되었다. 이에 경성, 개성지역 등에 위치한 수많은 고분들이 파헤쳐졌고, 수습한 유물들은 일본 등으로 유출되었다.

1900년대에 이르면 본격적으로 관학(官學)에 의해 한국의 문화유산에 대한 조사가 시작된다. 1900년, 동경제국대학 인류학교실에서 야기 소자부로(八木?三朗)를 조선으로 파견하여 문화유산을 조사한 것이 처음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에 의해 1902년 건축물 조사가 진행되었고, 1909~1911년 고적조사를 통해 한반도를 대상으로 본격적인 조사를 하였다. 이는 통감부 탁지부(度支部)에 요청으로 실시한 것으로 1909년 세키노 다다시는 경기도, 황해도, 평안도, 경상도, 충북 옥천 등에 대한 고건축·고적조사를 하였다. 1910년에는 경상도, 전라도, 충북 옥천과 보은 등을 조사하기도 하였다.

이후 1916년 조선총독부는 「고적 및 유물 보존규칙」을 제정 및 시행하며 산하에 고적조사위원회를 설치하였다. 「보존규칙」에 의해 1916년부터 1920년까지 5개년에 걸친 고적조사가 실시되었다. 조사의 진행은 1909년 참여한 학자들과 함께 도리이 류조(鳥居龍藏), 오바 츠네키치(小場恒吉), 오가와 게이키치(小川敬吉), 세키노 다다시의 동생 노모리 켄(野守健) 등이 합류하였다. 이들의 표면적인 이유는 조선 내의 문화재를 보존하여 유출을 방지하고, 조선총독부박물관에서 조사와 보존, 진열을 하기 위한 것이라고 명시하였지만 실상은 한반도 통치의 문화적 지배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이 조사에 대한 결과는 『유적 및 유물 소재 보고』라는 문서로 현재까지도 관련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청주 상당산성·부모산성, 진천 도당산성·대모산성 등에 대한 위치, 현황에 관한 기록이 있어 당시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조선총독부는 1920년대에 접어들면 조선사편찬위원회, 1930년대는 조선고적연구회와 같은 단체 및 조직 등을 설립하였고 문화유산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지속하였다. 이러한 조사의 결과는 『조선고적도보』, 『고적 및 유물 조사서』, 『고적 및 유물 등록대장』과 같은 자료를 통해서 당시 충청북도 문화유산에 대한 기록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당시 찍은 유리건판을 통해 보은 법주사·대야리 고분군, 옥천 향교, 단양 온달산성 등 당시 유적의 모습을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연구성과는 현재 많은 연구자들에게 유용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더욱이 현재는 사라지거나 파괴된 문화유산 연구에 있어 그 중요성은 매우 높다. 이에 경주, 부여와 같은 지역에서는 당시의 연구 성과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지만 충청북도는 아직 이와 관련된 작업이 진행되지 않았다. 아픈 역사가 남긴 흔적이지만 그저 분노만 해서는 안될 일이다. 지역 문화유산의 심도깊은 연구를 위해 우리 도도 일제강점기 기록을 다시 재검토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진정 아픈 역사를 극복하고 미래로 나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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