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타산을 오르다
두타산을 오르다
  • 박경희<수필가>
  • 승인 2016.02.21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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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가는대로 붓가는대로
▲ 박경희

감기를 앓는 중에 두타산을 다녀왔다. 오래갈 듯한 몸살감기였지만 나는 움직이는 쪽을 택했다. 몸져 누워있는 일이 너무 낯선 일처럼 느껴져 차를 잡아타고 두타산으로 향했다. 초입에 소나무들이 묵은 잎사귀들을 날리며 진득한 향기로 반겨 준다. 소나무가 언제나 푸른 것은 묵은 것들을 털어 버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신선하게 살아있는 생명의 원동력이다.

2월의 산은 야누스의 얼굴이다. 양지쪽과 음지쪽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공존하는 두 계절을 만날 수 있다.

마른 나뭇가지에서도 꿈을 간직한 씨눈을 키워 가는 겨울 산의 모습과, 땅 위에 물을 길어 오르는 돋아나는 생명의 바쁜 움직임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두타산을 오른다. 묵은 낙엽들이 깔려있는 능선, 공존하는 두 계절, 하나의 봉우리를 지나 더 높은 봉우리를 향하여 터벅터벅 발걸음 옮기며 둘러보는 두타산이 참으로 아름답다.

삼국시대에 신라장군 실죽(實竹)이 쌓은 석성인 두타산성 터가 오랜 풍상을 견디면서 돌무더기로 남아서 등산객들을 반기고, 멀리 보이는 초평호의 수려한 경관이 절묘한 아름다움으로 한눈에 들어온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봄이요,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겨울이다. 너무도 익숙하여 눈을 감아도 보이는 길, 한 굽이 돌아서면 구부정한 소나무가 있고, 또 한 굽이 돌아서면 계곡을 타고 올라오는 바람을 만날 수 있는 바위가 있고, 쌓아놓은 돌탑 모양까지 기억하는 산.

정상을 향하여 갈지(之)자로 나 있는 나선형의 오르막길, 칼날을 눕힌 부드러운 바람이 한 발 한 발 힘겹게 내 딛는 등을 떠밀어 올려 준다. 내 인생 여정을 닮은 길, 완만한 오르막, 올라갈수록 산이 깊어지고 급경사를 이루는 가파른 길을 오른다. 등에서는 땀이 흐르고 가슴은 두방망이질한다.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며 철저히 나와의 시간을 갖는다.

2월의 산에서 새로운 느낌으로 만나는 두 계절, 내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를 만나는 것 같다. 빈 의자에 앉았다. 산이 침묵한다. 나도 침묵한다.

산은 무거움을 털려 침묵하고 난 할 말이 많아 침묵한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 그것은 침착해 지는 것이며 세상을 품어 안는 어머니가 되어 가는 것이다. 나에게 철저하지 못했던 지난날, 관대했던 지난날, 아직도 살아갈 날이 많건만 무엇을 계획하고 생각하는지, 미래를 설계하지 못한 나, 준비성 없고 세상과 적당히 타협했던 나를 돌이켜 본다. 채운 것 너무 많아, 버려 할 할 것 너무 많아 무거운 가슴으로 바튼 숨을 고르며 한 발 한 발 오르고 올라 두타산 정상에 섰다. 그리 높지 않은 산, 언제나 그렇듯 산은 늘 풍성하고 여유롭다.

훈풍을 벗 삼아 가파른 절벽을 내려서니 초평호의 금빛 물결이 눈부시다. 그 눈부심에 실루엣으로 다가서는 형상, 자세히 살펴보니 영락없는 한반도 지형이다. 목포에 부산, 제주도까지…,확연히 드러나는 백두대간에 정맥들까지.

더욱 기이한 것은 청룡이 한반도를 품은 것이다. 초평호의 물길이 청룡이다. 놀라운 이 모습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 두타산의 관음봉 속칭 삼형제봉이다. 내 고향 진천에 이 무슨 영원무궁한 대자연의 이치란 말인가!

맑은 공기는 더 없이 청량하고, 불어오는 바람은 투명한 햇살과 어울려 마음속 앙금까지 씻겨 준다. 바람이 언제나 같은 노래를 부르지 않듯 쉼 없이 흘러가는 바람결에 세상사에 묵직했던 마음 낭떠러지로 떨어내 보내고 다시 길을 재촉했다. 하루의 피곤을 띄워 보내고 돌아오는 길, 마음은 온통 초록으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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