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을때 잘해
있을때 잘해
  • 김희숙 <수필가·산남유치원교사>
  • 승인 2015.10.01 15: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계단을 오르며 그림을 본다. 샤갈의 ‘파리의 신랑신부’, ‘산책’이라는 그림이다. 보랏빛이 설핏설핏 들어간 매혹적인 색이 나의 시선을 잡아끈다.

매일 오르내리던 계단인데 오늘따라 그림의 색채가 환상적으로 느껴진다. 아들이 자주 보았던 그림이다. 아들은 샤갈의 그림을 무척이나 좋아했었다. 한참을 그림에 눈을 던지며 아들을 생각하다 걸음을 옮긴다.

교실로 들어가 창문을 연다. 산에 맞닿은 창 쪽에서 새들의 지저귐이 들린다. 아이들에게 새소리를 함께 들어보자고 하고 나도 눈을 감고 새 소리를 음미한다. 재잘거리는 새들의 노랫소리가 상쾌하다. 새 소리에 아침을 열고 있는데 한 아이가 통을 내민다. 뭐냐고 묻자 “텃밭에서 키운 거예요. 친구들과 나눠 먹고 싶어요.”라고 한다. 아이가 내민 통 안에는 토마토가 들어 있다. 나는 큰 소리로 말한다. “얘들아 ○○가 직접 키운 거래. 우리 먹어 볼까?” 그러나 아이들 반응은 쌩했다. “나 토마토 안 좋아해요,”한 아이가 말하자 여기저기서 토마토 먹기 싫다는 소리가 터져 나온다. 대부분 아이들은 지독하게 토마토를 싫어한다. 나는 아이가 속상할까 봐 일부러 더 맛있게 먹어준다. 몇몇의 아이들이 다가와 토마토 먹는 것을 거든다. ○○는 자신이 기른 것을 아이들이 거들떠보지 않자 실망한 듯 말없이 고개를 숙인다. 고개 숙인 아이를 품속에 안으며 내 아들을 떠올린다. 체구가 작고 수줍음이 많은 아이. 내 아이도 그랬다.

천명이 넘는 아이들 속에서도 유독 내 아들만 눈에 가득 들어왔다. 체구가 작고 깡말랐어도 내겐 어느 누구보다도 커다랗고 선명하게 보였다. 연병장에 줄을 서서 아들은 나를 찾는다. 여러 사람 속에 섞여 있는 내가 보이지 않는지 아들은 두리번거렸다. 나는 손을 흔들며 “○○야~ 엄마 여기 있어~ 파이팅!”이라고 소리쳤다. 아들은 나를 발견하고 웃는다. 그 웃음 속에서 묘한 불안함이 감지되었다. 쌩한 겨울 바다에 아이를 홀로 남겨두고 오는 것만 같았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까까머리 아들을 훈련소에 남겨두고 못내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옮겨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걱정이 태산이었다. ‘입도 짧은데 잘 먹을까? 내성적이라 친구들과는 무리 없이 지낼 수 있을까? 무좀이 있는데 훈련받는 데는 지장이 없을까?’ 이런저런 근심에 뒤척이며 새벽을 맞았다.

새벽 여명이 방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난 아들의 방을 치우기 시작했다. 폭탄 맞은 것 같은 방을 치우며, 내 마음도 폭탄 맞은 것처럼 어지러웠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옷가지들이 마치 전장의 파편처럼 심란하게 나뒹굴었다. 아들이 집을 떠난 지 이틀이 지났다. 그런데 왜 이리 허전한지 몇 년은 지난 것 같다. 아들의 빈방을 보며 아들이 군대에 갔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쓸쓸한 바람이 커튼을 휘날리며 내 가슴으로 다가왔다. 어려서도 커서도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아들을 제대로 돌봐 준 적이 없었다. 그래서 키가 잘 자라지 않은 것도 간식을 잘 챙겨주지 못한 내 탓 같고, 내성적인 것도 엄마인 내가 상호작용을 많이 안 해주고 신경을 못 써줘서 그런 것 같고, 무좀치료를 다 못하고 치료 도중 군에 간 것도 무책임한 엄마인 내 탓인 것 같았다. 그토록 좋아하는 그림 그리는 것을 못하게 한 것도 후회되었다.

아들이 돌아오면 먹고 싶은 것 마음껏 먹게 하고, 하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해주리라. 이 넓은 세상을 마음껏 누빌 수 있도록 무한한 지원을 해 주리라. ‘있을 때 잘해!’라는 유행가 가사가 자꾸만 머릿속을 스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