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루쟁이의 모성
소루쟁이의 모성
  • 이수안 <수필가>
  • 승인 2013.05.12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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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밭에서 온 편지
이수안 <수필가>

봄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느티나무의 신록은 원두막을 덮을 정도로 우거졌고, 포도나무는 하루에 한 마디씩 잎사귀를 피워 올린다.

포도나무 아래에도 무수한 생명이 치열한 삶을 이어간다. 풀은 바닥에 깔아놓은 차광망 귀퉁이를 들추며 기어이 올라오고야 만다. 민들레나 별꽃의 키 작은 풀 사이사이로 명아주와 씨앗동처럼 키 큰 풀이 보이고, 드문드문 소루쟁이도 보인다.

큰 풀이 있는 곳은 으쓱해 뱀이 있기 십상이다. 안전을 위해 삼복더위에도 장화를 신는데 그러자니 무좀을 신경써야하는 고충이 있다. 때문에 키 큰 풀은 보이는 대로 뽑아내는 것이 상책이다. 풀과 농사꾼의 긴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명아주나 씨앗동은 한 손으로도 쑥쑥 잘 뽑히지만 소루쟁이는 질기기가 쇠심줄에 버금간다. 두 손으로 잡고 몸을 뒤로 젖혀가며 당겨도 뽑히지 않는다. 절대로 땅을 놓지 않겠다는 일념이다. 뿌리도 깊어 삽으로 퍼내듯 뽑아내야 완벽하게 제거할 수 있다. 호미로 어설프게 캐다 뿌리가 남으면 또 싹을 피워 올려 생명을 이어가기 때문이다. 씨앗은 또 얼마나 많이 맺는지, 초장에 잡지 못하면 두고두고 골머리를 앓을 수도 있다.

이렇게 강한 소루쟁이도 약점이 있다. 꽃 피고 씨앗 영그는 유월이 깊어지면 진녹색으로 윤기 흐르던 잎이 건조해지며 색도 옅어진다. 체내의 온 에너지를 몽땅 씨앗 여물기에만 쏟아 붓기 때문이다.

이때는 힘들이지 않고도 슬슬 잘 뽑을 수 있다. 씨앗을 위해서라면 그토록 단단하던 뿌리의 힘 까지도 기꺼이 놓아버리는 모성. 어쩌면 내 어머니를 그리도 닮았는지.

어머니는 슬하에 2남 5녀를 두셨는데 두 아들 때문에 평생 애간장을 녹이며 사셨다. 젊은 시절의 어머니는 일할 때 막걸리를 한 잔씩 하셨는데 큰오빠가 술에 절어 산 뒤로 술 한 잔 입에 대지 않으셨다.

와중에 신혼시절의 작은 오빠가 두 손을 잃는 사고를 당했다. 그 후 어머니는 여행을 가신 적이 없다. 동네 부녀회에서 주최하는 흔한 효도관광 한 번 가신 적이 없었으니 그 슬픔의 크기를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으랴. 맨손으로 시작해 알차게 살림을 일구었지만, 자식의 행복만큼은 당신 의지대로 못 하신 것이다.

어머니는 큰오빠가 술에 절어 사는 것도, 작은오빠가 사고로 두 손을 잃은 것도 당신 죄라고 생각하셨다. 특히 두 며느리에게는 늘 죄인이 되어야만 하셨다. 당신 삶의 모든 촉을 두 아들을 위해 세우고 사셨지만, 그 어떤 노력도 아무 힘이 되지 못하자 그저 소처럼 일만 하며 부처님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땅만 보고 사셨다. 나 또한 만만치 않은 삶으로 그 무거움에 보탰으니 한 많고 애달픈 마음을 어찌 달래셨을까. 지금 계신 그곳에서는 애태우는 일 없이 평안한 표정으로 지내시는지.

속이 후련하도록 마음 놓고 효도 한 번 해드리지 못한 회한 때문일까. 어머니 가신지 열두 해가 지났건만 희미해지기는커녕 이맘때면 새록새록 더 간절해진다. 꿈속에서라도 오월의 햇살처럼 환한 표정의 어머니를 뵐 수 있었으면….

코가 찡하도록 그리운 어머니를 생각하며 튼실한 소루쟁이 옆에 삽날을 대고 푹 힘을 준다. 뽑아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무좀 치료제로 쓰기 위해서다. 다음 해에도, 또 다음 해에도 이 약초를 통해 나는 어머니를 만날 것이다. 먼 길 가신 뒤로는 꿈에서조차 한 번 만날 길 없는 내 어머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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