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만이라도…
오늘 하루만이라도…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12.29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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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한 덕 현 편집국장

일부러 찾아 간 것은 아니지만 산행 중에 잠시 들른 백담사는 주변의 빼어난 풍광보다는 역시 '전두환'이라는 이름 석자 때문에 각별하게 다가왔다. 그가 이곳으로 쫓겨와 영부인과 함께 기거했다는 방은 한두 평이 될까 말까 한 아주 옹색한 공간이었다. 벽지까지 듬성 듬성 해진 퇴락한 모습에서 쉽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한 시대를 서슬퍼렇게 호령하던 그가 이 쪽방에서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속으로 잔인한 질문을 던져 봤다.

1997년 12월 정치적 사면에 의해 감옥에서 나오는 날, 그는 골목을 지키고 있던 기자들에게 이런 말을 던졌다.

"여러분들은 감옥에 가지 마십시오, 거기 안 좋습니다."

그 순간 많은 국민들은 인간 전두환의 가장 진솔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가 백담사에서 얻은 게 있다면 바로 이런 평상으로의 회귀가 아니겠는가.

지금 2009년 새해를 앞두고 '처음처럼' 이라는 서화(書畵) 달력으로 유명세를 치르고 있는 신영복 교수가 이른바 통혁당 사건으로 투옥돼 무려 20년 20일을 복역할 당시, 그가 남긴 옥중 서신 중에 정말 읽는이의 가슴을 후벼파던 내용이 하나 있었다. 가족 중 계수에게 보낸 편지다.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중략… 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사람을 단지 37도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중략...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움받는다는 사실은 너무 불행한 일입니다.'

이런 글을 읽으면서 가슴에 와 닿은 것은 그가 이념으로 무장된 투사이고 피도 눈물도 없는 사상범이라는 생각이 아니라 가장 사람다운 모습이라는 감흥밖에 없었다. 그에게 씌워진 빨갱이라는 혐의가 맞고 틀리는지를 떠나서 말이다. 그는 미워하는 대상이 이성적으로 옳게 파악되기도 전에 말초 감각에 의해 그렇게 단정지어지는 것을 혐오하며 이런 글을 썼다고 한다. 권력의 가장 큰 피해자가 스스로 증오를 털어버리려 마음을 다스린 것이다.

80년대 중반을 휩쓸었던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의 변론을 맡은 고 조영래 변호사가 마지막까지 손에서 못 놓은 것은 국가와 사회의 도덕성 회복이다.

그는 도덕적 위기야 말로 그 어떤 군사적 정치적 혹은 사회경제적 위기보다도 앞서는 대한민국의 가장 근본적인 위기라고 단정했다. 구속과 수배. 피신을 거듭하다 폐암을 얻어 생사의 기로에 섰을 때도 몸을 추스르지 못하고 인권 변호에 매달린 이유는 오직 한 가지, 국가 도덕성 상실에 대한 본인의 책무를 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권력의 탐욕이 국가 도덕을 망친다며 이를 비우라고 법정에서 외치다가 43세의 짧은 삶을 마감했다.

시장 바닥에서 험한 일을 하며 평생 모은 돈을 학교 등에 선뜻 쾌척하는 이들의 공통점은 나이가 지긋하다는 것이다. 이들을 움직여 사회를 감동시키는 배경은 다름 아닌 삶의 유한함이다. 젊음도, 재산도, 여성의 미모도 그리고 권력도 때가 되면 다 끝이 있다. 이를 알기에 자기를 위해선 한푼도 쓰지 못한 소중한 돈을 아낌없이 나눠주는 것이다.

올해가 딱 하루 남았다. 오늘만이라도 제발 인간적인 얘기를 듣고 싶다. 하지만 국회엔 여전히 핏발이 서리고, 먹고살기 힘든 국민들은 앞날을 두려워하고 있는데 나랏님들의 말엔 왜 그리 쇳소리가 많은지. 하늘을 찌를 것 같은 탐욕과 이기가 두렵기만 하다.

백담사와 감옥에서의 교훈, 그리고 법정의 자책과 시장바닥의 깨우침이 왜 그들에게는 멀게만 보일까. 오늘 단 하루만이라도 '집착'에서 벗어나 뒤를 한번 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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