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에 쓴 편지
크리스마스에 쓴 편지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12.25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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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정 규 호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이제 크리스마스도 지나고 아비들의 어깨는 한시름을 덜었을 겁니다.

한 해가 가고 새로운 한 해를 맞는 계절 탓인지 크리스마스는 늘 싱숭생. 50을 넘긴 나이임에도 나에게는 아직 덧이 어리기만 합니다.

큰 녀석은 이제 새해가 되면 고등학교에 진학할 예정이고, 작은 아이는 초등학교 6학년이 됩니다. 어느 해라도 그렇듯 이번 크리스마스에도 나는 덧에게 기꺼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노릇을 대신했습니다.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빵집에서 케이크를 고르고, 그 녀석들이 갖고 싶어 하던 것이 무엇이었던가 곰곰이 생각하면서 새삼 삶의 평온을 만끽합니다.

혹시 그 나이에도 아직 내 덧이 아직 산타클로스의 존재를 믿고 있는지 물어 보았습니다. 작은 녀석은 서슴없이 산타할아버지는 꼭 있다고 대답하는데, 글쎄요. 이 아이도 벌써 산타의 노릇을 애비가 대신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아차린 눈치입니다.

큰 아이의 대답은 더 걸작입니다. 나는 짐짓 산타클로스는 무슨 옷을 입고 다니냐는 식으로 질문을 바꿔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녀석이 산타는 요즘 찾아갈 곳이 많아서 아빠가 입는 옷과 비슷한 차림으로 변장을 하고 다닌다는 겁니다.

산타의 빨간 옷은 한 콜라회사의 판매 전략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라는 다분히 현실적인 푸념을 하려 했던 나의 의도는 보기 좋게 빗나가 버린 셈이 됐습니다.

그리고 성탄 아침 내 머리맡에 놓여 있는 딸아이의 카드는 그야말로 감동이었습니다. 늘 어리기만 한 줄 알았던 초등학교 5학년짜리가 언제 배웠는지 한 땀 한 땀 정성들인 바느질 솜씨가, 그 정성이 배어있는 그 카드엔 그러나 가슴 저린 한마디가 있습니다.

'오래 오래 건강하게 사세요.' 연필로 꾹꾹 눌러 쓴 그 글귀에는 그 녀석의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 아직은 건강하다고 그리고 오래 오래 건강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내 막연한 자신감은 이제 이미 덧의 눈에도 경계해야 할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나 봅니다. 우리가 세상을 보는 눈은 늘 그렇습니다.

크리스마스에만 나타나는 산타클로스는 현실세계에는 없는 것임을 잘 알면서도 때가 되면 어느 특정 대상에 대해 내가 산타가 되어야 하고, 또 그런 환상과 동화 속의 이야기를 내 자식들은 오래오래 믿고 있기를 소망합니다. 게다가 나는 늘 그렇고 그렇게 그야말로 막연하게 살아오고 있음에도 남이 그걸 눈치 챌까 전전긍긍하며 스스로를 덧칠하거나 포장에 급급합니다.

영화 '오스트레일리아'가 감동인 것은 바로 이런 포장을 걷어내고 아린 역사의 상처를 진솔하게 드러낸 시도에서 비롯됩니다.

물론 긴 러닝타임(166분)과 웅대한 스케일에도 불구하고 호주관광 CF에 불과하다는 혹평도 있긴 합니다만, 그래도 그들의 인종차별주의의 역사적 그늘을 솔직하게 드러냈다는 점은 마음에 듭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쥐띠 해 무자년을 각자의 역사에 새겨둔 채 새로운 소띠의 해를 맞이하게 됩니다.

기축년(己丑年) 새해에는 어느 때고, 또 누구에게도 산타클로스가 되는 친절함으로 살았으면 싶습니다.

그리고 헛된 포장 걷어버리고 진정으로 솔직한 역사를 써나갈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많이 힘들 세상이겠지요. 아니 힘든 정도가 아니라 삶 자체를 위협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새해 새 역사를 기다리는 건 늘 희망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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