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이여, 안녕
불안이여, 안녕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07.20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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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뉴스를 듣자면 우리가 살고 있는 마을에 사건이나 사고가 적지 않음을 실감하게 된다. 자동차 폭탄 테러로 수십 명이 죽고 비행기는 활주로에서 미끄러지면서 건물을 들이받아 수백 명의 목숨을 거두어간다. 그도 아니면 장기를 두다가 말다툼이 되어 흉기를 휘두르기도 한다. 이제는 바람이 불지 않아 나뭇잎이 흔들리지 않는 정적의 시간이 오히려 두렵다.

손수건 만큼밖에 되지 않던 해가 보자기만큼 커진 요즘 이른 저녁을 먹고 집 근처의 대학으로 산책을 간다. 나무로 뒤덮인 학교는 도심 속에 있어도 공기가 맑고 시원하다. 그래서는 아니겠지만, 사람들이 큰 운동장을 가득 메운 채 운동에 열중한다. 모두들 땀으로 옷을 적신 후에야 건강을 보장 받은 듯 상쾌한 발걸음을 집으로 향한다. 건강한 삶을 추구하는 욕구가 아름답다.

텔레비전을 켜면 100세까지 건강하게 살아야 한다며 갖가지 운동 방법과 약을 홍보한다. 잘 먹고 잘 살기가 여간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음식을 먹으면 몸의 어디에 좋고 어떤 음식을 먹으면 몸을 망친다고도 한다. 모두 고마운 정보이고 고마운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류는 늘 고민에 빠져 있어 시가 이러한 인류의 고민에 눈을 돌리는가 보다.

'파리채에 맞은 파리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거나 기절했다가 다시 살아나 터진 창자를 방바닥에 끌고 다니거나 훌쩍 날아간다 아마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느 분도 파리채 같은 것을 휘둘러 인간을 즉사시키거나 창자를 터뜨리거나 압사시켜 고통을 주시는가 보다 문제는 파리채를 든 내가 나뭇잎이나 풀잎에 붙어서 일생을 보내는 파리와 오물과 밥상과 내 얼굴을 왔다갔다하는 파리를 구분하지 않듯이 어느 분도 착한 인간이나 악한 인간을 모두 똑같은 인간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류의 고민이다.'

-공광규의 '인류의 고민'전문-

시의 화자는 사건이나 사고로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채에 맞아 죽어가는 파리의 모습을 동일시 한다. 그래서 파리채를 든 화자가 공격하는 파리를 선택함에 아무런 이유가 없듯이 사건이나 사고로 죽어가는 사람도 그의 선악과 무관하다. 여기에 인류의 고민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정말로 사람의 목숨이 파리 목숨과 같다.

화자의 몸짓에 죽어가는 파리를 통해서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 시인의 눈인가 보다. 그냥 두어도 인류 사회는 진보하고 향상되어 간다는 우상(偶像)은 20세기 초의 두 차례에 걸친 세계 대전으로 무참하게 파괴되었다. 그로 인하여 인류는 불안해졌으며, 정말로 인간은 던져진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다. 언제 닥칠지 모를 죽음의 공포, 즉 유한성이라는 쓰라린 현실을 목도(目睹)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건강한 삶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실존이란 고독하고 불안한 존재로만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기분에는 우울한 기분만이 아니라 즐겁고 행복한 기분도 있지 않은가. 이런 기쁨의 상태에서 우리의 생은 불안에 찬 순간이 아니라 환희에 찬 순간이다. 과거는 긍정으로 미래는 가슴 부풀게 하는 전망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내일 비록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해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던 철인의 말이 가슴에 와 닿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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