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장망 안에서 '평화로운 자연'을 보다
위장망 안에서 '평화로운 자연'을 보다
  • 김성식 기자
  • 승인 2010.05.11 07: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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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식기자의 생태풍자
김성식 생태전문기자<프리랜서>

멧돼지에게 또 한 번 된통 놀랐다. 지난 8일 '계곡의 잠수부' 물까마귀의 육추(새끼 기르기) 과정을 촬영하기 위해 보은의 어느 계곡에 들어가 잠복하고 있을 때였다. 새둥지 근처에 카메라를 설치한 뒤 위장망을 푹 뒤집어쓴 채 숨죽이고 있는데 뒤쪽 절벽 위에서 갑자기 돌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심상치 않아 뒤돌아보고 싶었으나 그때 마침 물까마귀 어미 1마리가 먹이를 물고 나타나기에 계속 셔터에만 신경썼다. 그러길 5분여. 뒤에서 소리가 난 일은 잊은 채 서너 컷을 더 찍고 나서 사진상태를 확인하고 있는데 이번엔 등뒤에서 씩씩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한데 이게 웬일인가. 2m 앞으로 송아지만한 멧돼지 1마리가 지나가고 있었다. 숨이 멎었다. 야생 멧돼지와 직접 맞닥뜨린 급박한 상황이니 머리카락이 있는 대로 쭈뼛 섰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눈에 비친 멧돼지표정이 의외로 태연했다. 나를 보지 못한 것이다. 그게 문제였다.

다행이다 싶은 순간 나도 모르게 헛기침을 해댄 것이다. "흐~흠!" 갑자기 사람소리가 나자 멧돼지 행동이 걸작이었다. 마치 자갈밭에서 산악오토바이가 전속력으로 스타트하듯 꽥! 소리와 함께 바람처럼 사라졌다. 야생 멧돼지가 빠르다고는 하나 그처럼 비호같은 줄은 미처 몰랐다.

위장망이라고는 하나 가는 어망에 먼지떨이 같은 술을 듬성듬성 달았을 뿐인데 그 효과가 대단했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2개의 바위 틈새에 위장망을 치고는 죽은 듯 들어앉아 있는 나를 눈치 채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해서 느긋하게 지나던 중인데 돌연 이상한 물체 안에서 뜬금없이 인기척이 들리니 멧돼지인들 기겁할 수밖에.

소스라치게 놀랐던 건 나였는데 되레 헛기침 한 번에 똥줄 빠지게 달아나는 멧돼지를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평화로운 외출을 방해한 게 미안하기도 했으나 커다란 몸집이 까무러치듯 달아나는 품새에 도저히 웃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날 마주친 것은 멧돼지뿐만이 아니었다. 다람쥐 1마리는 위장망 안으로 기어들어 내 장화 위에 잠시 올라섰다가는 느낌이 이상했던지 이내 달아났고 족제비 1마리는 위장망을 걸쳐놓은 한쪽 바위 밑을 지나다가 한참을 서서 혀로 몸치장하고는 태연스럽게 사라졌다. 살아있는 야생 족제비를 바로 눈앞에 두고 쳐다보기는 난생 처음이어서 그저 신기한 마음에 꼼짝 않느라 사진 찍는 걸 그만 깜빡 잊었다.

그 밖에도 앙증맞은 굴뚝새와 노랑할미새 등 많은 새들이 다가왔다가는 사라졌다.

위장망 안에서 바라본 자연은 지극히 평화로웠다. 그것이 비록 겉으로 보이는 평화일망정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할 동물들이 아직 상당수 건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위안이 됐다.

위장망 안에서의 시간은 또 많은 것을 생각케 했다. 위장망을 쓰지 않고서라도 인간이 아무때나 그들 자연과 함께 허물없이 지낼 수는 없을까. 공상 같지만 과연 그것이 불가능한 일일까.

또 이번 촬영을 통해 물까마귀의 특별한 자식사랑을 확인하게 됐다. 물 바깥에서 먹잇감을 잡는 것도 어려울 텐데 매번 물속에 들어가 헤엄치면서 먹이를 잡아다 새끼들에게 먹이니 그보다 더한 부모의 정이 어디 있는가.

쉬지 않고 먹이를 물어다줘도 곧장 배고프다고 보채는 새끼들이 그저 안쓰러운 양 더욱더 열심히 잠수질에 나섰던 물까마귀 어미들. 해가 어둑어둑해서야 고된 날갯죽지를 추스르며 서로를 위로하던 그들 부부를 바라보면서 문득 내 어깨에 짊어진 불효의 짐이 떠올랐다.

공교롭게도 어버이날이었던 그날, 물까마귀에게서 부모의 숭고한 내리사랑을 다시 되새기는 계기가 됐다.

잊지못할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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