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방위 더 낮아져야
범방위 더 낮아져야
  • 권혁두 기자
  • 승인 2009.07.16 21: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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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권혁두 부국장 <영동 · 보은 · 옥천>
   얼마전 감기에 걸려 한 병원을 찾았다. 대기실에서 차례를 기다리던 중 벽에 걸려있는 액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검찰의 범죄예방위원 위촉장이었다. 위촉장 옆에는 병원장의 의대 졸업장과 전문의자격증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대학 6년의 고행이 담긴 졸업장, 인턴과 레지던트 등 피나는 수련과정을 거쳐 얻은 전문의 자격증은 당사자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공인된 성취와 명예의 상징이다. 범방위원 위촉장이 이와 맞먹는 위상을 과시하며 어깨를 나란히 한 모습에서 검찰의 위세가 유감없이 드러났다.

범죄예방위원회는 지검, 지청 등 검찰 단위기관별로 구성돼 선도조건부 기소유예자나 보호관찰대상자 지도, 갱생보호대상자 취업알선 등 범죄예방 활동에 나서는 민간단체이다. 검사장이나 지청장이 인선하고 법무부장관이 위촉한다. 초기에는 내로라하는 지역 토호들이 참여해 검사들의 밥과 술자리를 챙기는 후원회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지금은 다양한 분야에서 위원을 선임하고 봉사활동과 장학사업도 펼치며 쇄신을 지향하는 중이다. 그렇지만 아직도 범방위원은 지역에서 행세깨나 하는 사람들이 선망하는 자리이고 과시하고픈 자리이다. 외연을 넓히고 문턱을 낮췄지만 구성원들은 여전히 지역의 주류 일색이다. 바닥의 정서가 법집행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오는 데는 범방위도 한몫을 한다.

천성관 전 서울지검장이 검찰총장실 입구에서 낙마했다. 인사청문회에서 이런저런 의혹이 제기됐지만 결정적 하자는 한 지인과 맺은 각별한 인연에서 터져나왔다. 천 검사장은 그에게서 현금 15억원을 빌려 집을 샀고 부부동반으로 해외여행을 나가 부인들이 호화쇼핑을 한 정황도 드러났다. 농민의 80%가 신용불량자가 돼버려 저리로 준다는 영농자금 몇백만원도 빌리지 못하는 것이 이 나라의 현실이다. 그런데도 천 검사장은 달랑 차용증 한 장만 받고 15억원을 빌려준 지인이 친구가 아니라 그저 아는 정도라고 했다. 검사와 그냥 알고 지내는 관계를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부담이 공시된 셈이다.

걱정스러운 것은 이런 인적 네트워크에서는 낮은 곳, 약자를 지향하는 권력이 행사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주고받을 것 있는 사람들끼리의 '유유상종'은 그들에게는 차별과 갈등이 없어 편리하겠지만, 사고나 시각은 보편성을 잃기 마련이다. 더욱이 그 고립된 소수의 세계에서 공공을 기율하는 기준과 방향이 재단된다면 문제가 심각하다. 검사들이 하루하루가 고단한 인생들과 지기가 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바닥층과 교감 정도는 유지해야 하는 이유이다.

다시 범방위원 얘기다. 범방위원회가 지역 인사들을 주도해 장학금도 조성하고 어려운 이웃도 도우며 선행을 전파하는 것은 박수칠 일이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상대적으로 법의 보호가 필요하고 권력의 수혜에서 소외되기 쉬운 하위 계층과의 교류이다. 특히 지방에 내려오는 젊은 검사들은 균형잡힌 안목을 공부한다는 자세로 바닥을 겪고 배우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제도적 기구인 범방위원회부터 더 낮은 곳으로 물갈이해야 한다. 검사와 인연맺어 하등 도움받을 일 없는 사람들, 받은 위촉장을 벽에 걸어두고 자부하기는커녕 책꽃이 한 켠에 끼워버릴지도 모를 사람들이 영입돼야 한다. 그래서 그들의 가감없는 투박한 목소리들이 검사들의 심장에 전달돼야 한다. 그래야 천 검사장처럼 숱한 의혹을 안고도 검찰총장 내정을 받아들이는 몰염치가 재발되지 않는다.

범방위원 위촉장이 영세농가에도 걸리고 영업용택시, 포장마차, 땀내 물씬 풍기는 환경미화원 대기실에도 걸리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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