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더라도 박수쳐야 할 이유
지더라도 박수쳐야 할 이유
  • 충청타임즈
  • 승인 2009.03.24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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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권혁두 부국장 <영동>

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준결승에서 한국을 꺾은 일본의 간판타자 이치로는 "이길 만한 팀에 이겼다"고 말했다. 한국을 이긴 것이 뭐가 대수냐며 당연한 승리였다는 투였다. 그의 오만한 발언은 국내 야구팬들의 공분을 샀지만 터무니없는 말은 아니었다.

일본에서 야구는 '국민스포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교 야구팀만 4000개가 넘는다. 이들이 모두 참가하는 '고시엔대회'는 아직도 일본 최고의 스포츠 이벤트로 군림하며 열도를 달군다. 한국의 고교팀은 50개 남짓이다. 환경도 열악하다. 학부모들이 훈련경비와 대회 참가비를 갹출해서 운영해야 할 정도로 가난한 팀이 적지않다.

선수를 키우는 인적 인프라에서 한국은 일본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프로야구 출범도 우리보다 46년이나 빠르다. 메이저 리그에 진출한 일본 선수들이 우리보다 압도적으로 많고, 그들이 호성적을 내는 것은 이런 기반이 구축돼 있기 때문이다. 내로라하는 한국 야구선수들이 일본에 진출했지만 성공한 선수를 꼽는데는 세 손가락도 남아돈다.

선수의 연봉이 그의 기량을 보증하는 절대적 기준은 아니다. 연봉에 못미치는 성적으로 소속팀의 애를 태우는 선수가 적지않다. 그러나 팀의 선수연봉 산정기준은 정밀한 객관적 데이터와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한다. 이번에 출전한 한국선수단 28명의 연봉을 모두 합치면 76억원이다. 일본 선수단 연봉총액 1310억원의 6%도 안된다. 이치로 단 한명의 연봉이 1700만달러(237억원)로 한국선수 28명 몫보다 3배나 많다. 이치로가 '이길 만한 팀에 이겼다'고 한 것은 양팀의 객관적 전력차가 이렇게 확연한데 결과는 뻔한 것 아니냐는 반문이었다.

이번 WBC에서 일본은 우리에게 두 번이나 졌다. 이번 대회에서 일본이 기록한 2패는 모두 한국을 상대로 한 것이다. 이치로를 비롯한 일본의 그 누구도 '이길 만한 팀에게 이겼다'는 방자한 발설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번 대회에서 일본과 2승2패의 시소게임을 벌였다고 실력이 균형을 이뤘다고 보는 것은 무리다. 객관적으로 산정된 전력의 차이는 아직도 분명하게 존재한다. 우리 선수들은 그것을 완벽한 팀워크와 불굴의 투지로 극복한 것이다. 그런 값진 승리였기에 잔뜩 경색된 경제와 정치, 쉬지않고 터져나오는 갖가지 사회비리로 숨막히는 일상을 보내고 있는 국민들의 가슴이 시원하게 뚫렸다.

오늘 일본과 결승전을 갖는다. 지긋지긋한 숙적을, 꼭 이겨야 할 순간에 다시 만났다. 그러나 국민들이 오늘 경기는 사활을 건 것 같은 승부욕에서 벗어나 여유로운 마음으로 응원했으면 좋겠다. 아시아 야구가 메이저 리그를 이끄는 강국들을 차례로 격파하고 종주국에서 우승을 다투는 경기라는 데 의미를 두면서 말이다. 솔직히 말해 선수들에게 또 다시 승리를 요구하기가 미안하고 안쓰럽다. 이미 우리 선수들은 불가능을 넘어선 영웅들이고, 결승전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박수를 받아야 할 주인공들이다.

승리에 환호하고 패배를 질타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먼지가 풀풀 날리는 낡아빠진 구장, 텅빈 관중석을 버스로 이동하며 야구를 하는 우리 선수들의 고단한 실상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야구보다 승패를 즐기는 국민들이 더 많다는 얘기다. 그래서 오늘은 승패에 집착하기보다 한국야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관전하는 분위기가 됐으면 좋겠다. 지더라도 손바닥이 터질 정도로 박수갈채를 보낼 준비를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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