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 잡힌, 시인의 이야기
균형 잡힌, 시인의 이야기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11.09 22: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채화의 문학칼럼
한 채 화 <문학평론가>

모든 시인이 시가 무엇이라는 확고한 시학적 정의를 가지고 시를 창작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시인은 막연하나마 시인이 상정하는 완전한 시의 기준을 가지고 있을 터이다. 즉 시인마다 완전한 시를 이루도록 해주는 원리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이를 일컬어 그 시인의 시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물론 시학 그 자체에 관심을 보이는 시인은 다분히 주지적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시학과는 비교적 거리감이 있는 시인의 경우는 다분히 주관적이라거나 직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양분의 논리가 절대성을 갖는다고 볼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설득력은 가지고 있다고 본다.

시는 정신의 집적물 가운데 가장 함축적이고 비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김순자 시인은 이러한 시를 무엇으로 쓸까. 사물을 대하면서 가지게 되는 많은 대화와 상상력이 무엇보다 앞선다고 본다. 또한 그 보다 더 우선하는 것은 시인의 감성이다. 물론 시를 쓰는 방법에 대하여 많은 습작의 과정이 필요하지만, 결국 시는 시인의 감성으로 쓴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섬세한 시적 형상화와 넘치는 열정의 시인 김순자. 그녀가 두 번째 시집('서 있는 시간', 2007, 정우기획)을 냈다. 독자들의 주목을 기대하며 그 가운데 몇 편을 읽어보기로 하자.

난 가고 또 가오리다/ 소리 없는 파도에/ 아름답게 잠겨 죽는다 해도/ 보이지 않는 뜨거운 춤사위/ 홀로 회오리치다 쓰러진대도/ 겨울 눈밭에 차디찬 바람이 된대도/ 난 오직 그 길만 가오리다.

-'시인 5' 일부-

시적화자의 길이란 소리 없는 파도다. 즉 내면을 향해 오롯이 나 있는 문학적 고뇌인 셈이다. 또한 그 길은 보이지 않는 뜨거운 춤사위로, 마치 문학적 열정에 압도되어 그냥 몸과 마음을 맡겨 버린 모습이 연상된다. 뜨거운 춤사위는 시의 자리에 들어앉은 치환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뜨거운 열정이 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광풍과 같이 뜨거운 가슴은 결코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오직 그 길만을 가겠다고 다시 한 번 더 다짐한다. 화자의 삶속에 시가 침윤되어 있어서 화자와 시가 동심원적 관계를 맺는다. 따라서 화자의 이러한 시적 긴장감이 화자의 삶에까지 이어지지 않을까 기대하게 된다.

시의 언어와 내용을 비틀어서 일치하지 않거나 무의미의 시를 쓰는 시인도 있지만, 김순자 시인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어쩌면 작법보다는 그 내용이 우선일 수 있다는 관점으로 본다면 시적 화자는 가고 또 가겠다고, 오직 그 길만 가겠다고 다짐한다. 결연해서 의지적이라고 보아야 한다. 비장미마저 느껴진다.

시란 같은 내용이라도 어떤 그릇에 담느냐가 중요하다. 바꿔 말하면 시의 형식은 그저 단순하게 내용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때로는 내용을 제한하기도 한다는 뜻이다. 러시아의 형식주의자들의 처지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내용이 가장 절실할 때에, 겉도는 기표(記標)처럼 시적인 형식의 비중이 덜한 경우가 있다. I.M.F.일기라는 제하의 연시들이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아픔이 시적 형식을 넘어 서고 있는 셈이다.

'씨앗심기'를 보면 시적화자에게 땀과 거름과 씨앗과 비와 태양과 하늘은 곧 부활의 구성소임을 알 수 있다. 그 모든 것에 의탁하여 묻고 심는데 삼라만상이 부활을 돕는다. 열병 같은 시간들도 있었겠지만, 흙의 가슴으로 돌아가서 오만의 외투를 벗어버리고 겸손한 진실이 알몸을 드러낸다. 어떤 고난도 즐거이 수용할 수 있는 포용력을 갖추어 기쁘다. 이제 부활을 심을 수 있다. 흙의 가슴은 그 씨를 예쁜 열매로 돌려준다. 비를 맞아도 즐겁고 기쁘다.

김순자 시인의 시학은 주관적이면서도 주지적이다. 그래서 시편들마다 감동을 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