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초 홍명희가 대통령 후보가 된다면
벽초 홍명희가 대통령 후보가 된다면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11.05 23: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충청논단
김 승 환 <충북민예총 고문>

1996년 11월 2일 금요일 오전, 모처에서 긴박한 연락이 왔다. 청주예술의전당에 걸린 현수막에서 '벽초 홍명희'라는 다섯 자를 빼라는 것이다. 대안으로 '임꺽정 문학제'가 제시되었다. 그날 오후에 시작하는 '제1회 벽초 홍명희 문학제'의 전체적인 규모와 윤곽이 가시적으로 드러나자 기관에서 이를 파악하고 경고성 진화에 나선 것이다. 그를 대행하여 긴급히 연락을 해 준 곳은 행정기관이었다. 그러면서 전하기를 아직은 금기(禁忌)인 '벽초 홍명희'를 공식적으로 내세우는 것은 위험하다는 조언이었다. 난처했다.

행사책임을 맡은 몇 분들과 상의를 했으나 현수막이 걸린 상태에서 철거하는 것도 그렇고, 또 작가의 추모행사이므로 순수한 마음으로 그냥 가야 한다는 결론이 났다. 실정법에 의하여 체포 또는 수사를 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행사 내내 아니 행사가 끝나고서도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행사는 성대했고 열의와 관심도 대단했다. 이렇게 시작한 '홍명희 문학제'였다. 그 문제적인 문학제는 2007년 올해로 12회를 맞이했다.

사회적 금기를 깨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이 금기를 깨지 않고서는 남북문제의 진전도 없는 것이고 또 예술가의 선배 예술가에 대한 순수한 존경도 표현할 수 없는 것이어서, 상당히 과감하게 시도했던 '홍명희 문학제'는 나름대로 의미가 컸다. 전국적인 파장도 적지 않았고 많은 주목도 받았다. 문학제를 개최하는 것이 단순한 예술행위를 넘어서서 역사사회적인 사건이 된 사례다.

그간 곡절도 많았다. 그 중 하나가 벽초문학비 사건이다. 1998년에는 괴산 제월대에 벽초문학비를 세웠다. 그런데 1999년 큰 사단(事端)이 났다. 보수단체에서 벽초문학비 철거를 시도했기 때문이다. 그분들에게 홍명희는 북한 부수상을 역임한 거두(巨頭)일 뿐이어서 남북 대치 상황, 즉 '전쟁 중인 한반도' 이남에서 벌어진 벽초문학비 건립이 이적행위로 보였던 것이다.

보수단체 회원들은 수백 명이 망치로 돌아가면서 내리쳐서 벽초문학비를 부수고 함께 감옥으로 가겠다고 알려왔다.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역사의 상처로 남은 그분들의 분노를 이해하고 우리 스스로 비문의 문안을 철거했다. 그리고 이듬해 정보계통의 도움을 받아서 다시 비문(碑文)을 새겨 넣었다. 1950년 한국전쟁 중 북한의 부수상이었다는 등의 객관적 사실을 첨가해 넣는 한편 홍명희를 타자화시켜서 보수단체의 동의를 얻었다. 나는 이것을 이해와 협력이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좌파와 우파가 대화를 통하여 상대를 이해하고 나아가 상생(相生)의 현명한 방법으로 갈등을 해결했다고 믿는다.

2007년 11월 2일 12회 벽초 홍명희 문학제에서 도종환 시인은 '벽초 홍명희 선생이 이번 대선에 나온다면'이라고 가정하면서 그렇다면 아마, 우파와 좌파 양쪽에서 공격을 받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우파로부터는 좌파라고 공격을 받고 좌파로부터는 중간파라고 공격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경제를 잘 모른다는 비난에 더하여 사람이 유약하다는 평가를 받는다는 것이다. 경제보다는 민족을, 극단보다는 중용(中庸)을, 개인보다는 사회를 우선했고 또 행동에 앞서는 품성을 가진 벽초 홍명희는 선전선동가의 자질이 없어서 대선에서 패배한다는 것이다. 세태풍자였지만 틀림없는 진단이었다.

무위진인(無位眞人) 벽초 홍명희는 시에서 "예로부터 굳세게 절조를 지키는 선비는(古來苦節士), 책은 팔더라도 절조를 팔지 않았다(賣書不賣節)"라고 읊은 그대로 지조 높은 선비로 일생을 살았다.

김일성 조선 주석도 그런 벽초의 고결한 인품과 결곡한 성정을 높이 평가하여 각별히 대했다고 전한다. 한쪽에 치우지지 않으면서 좌우(左右)를 아우르는 그의 포용력, 비타협의 노선을 가면서도 잃지 않았던 너그러운 이해심, 항일반제의 일관된 길을 걸었던 굳은 의지, 민족을 우선하면서도 세계를 생각하던 넓은 안목, 늘 소탈한 웃음의 겸양지덕, 인민이나 민중과 격의를 두지 않았던 평등의식, 질박 겸손한 성정 등 벽초 홍명희는 참으로 훌륭한 분이 아닐 수 없다. 혼탁한 세상에 그런 분이 있다는 것은 큰 위안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