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 파악이 먼저다
정체 파악이 먼저다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11.02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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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교육 칼럼
박 을 석 초등위원장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충북지부>

우리 학교는 탄력근무제 때문에 출근시각이 8시40분이다. 나는 보통 20분쯤 일찍 학교에 도착한다. 교무실에 들어가 찻물을 올려놓고 컴퓨터를 켜서 그날 할 일을 챙겨본다. 이메일 정리를 하고 교육청전자문서함을 살펴본다. 그렇게 여느 때처럼 하루를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갑자기 손전화가 울렸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저, 예지엄마예요."
"아, 안녕하세요"

"예. 다름이 아니라, 예지가 눈병이 나서 병원에 들렀다가 학교를 늦게 보낼까 해서요."
"아, 그렇군요. 상태가 좀 심한가요"

"아뇨. 심한 편은 아닌데."
"그러면, 마침 오늘이 기말고사 보는 날인데, 시험을 치른 뒤 병원을 가면 어떨까요"

"예,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할게요."

여기까진 그럭저럭 대화가 진행되었다. 흔히 있을 수 있는 자모와 담임간의 통화였다. 마침 예지한테서 며칠 전 개명을 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생활기록부 정정을 위해 개명일자를 확인할 요량으로 자모에게 물었다.

"그런데 예지가 개명을 했잖아요 정확히 며칠자로 개명이 된 건가요"
"예 우리 예지는 이름을 고친 적이 없는데요."

분명히 아이한테서 개명을 했다고 들었는데, 그런 적이 없다니, 이건 무슨 소리인가 대화가 삐걱거리는 순간이었다. 당황하여 물었다.

"예지가 동생 예찬이랑 함께 개명을 했다는데요. 나연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지 않았나요"

"무슨 말씀 하시는 거예요 우리 아이들은 최예지, 최 그대로인데요."

그 때서야 머리에 번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최예지는 3∼4년 전에 가르친 기억이 있는 아이였다.

"아이고, 어머님. 저는 박을석인데요, 휴대전화에 입력된 번호로 전화하다보니, 올해 담임선생님과 착각하신 듯합니다. 지금 저희 반에 강예지라는 아이가 있어 저도 착각을 하였구요."

"아∼, 선생님. 제가 전화를 잘못 걸었군요. 죄송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예, 안녕히."

라며 미처 말도 끝내기 전에 손전화가 조용해졌다. 그렇게 이른 아침의 황당한 대화는 끝이 났다.

자모는 아이의 눈병으로 등교가 늦을 것임을 알리기 위해 담임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담당반 아이 자모인 줄 알고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나는 현재 담임이 아니었고, 자모는 현재 자모가 아니었다. 비록 서로 몇 마디 말을 주고받기는 했으나 꼭 필요한 정보는 하나도 오고 가지 않았다. '아이가 눈병이 났다'거나 '오늘 시험을 치른다'거나 하는 대화는 애당초 할 필요가 없는 말들이었다.

대화가 올바르게 성립하기 위한 현실적 기초, 상대방에 대한 기본적 정보의 확인 없이 진행한 대화가 문제였던 것이다. 상대가 누군지 정체파악도 하지 않고서 무슨 대화란 말인가

교육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아이들의 정체를 단단히 파악할 때 제대로 된 교육을 향해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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