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담뱃대
어머니의 담뱃대
  • 김은혜 수필가
  • 승인 2024.04.07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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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은혜 수필가
김은혜 수필가

 

고인쇄 박물관을 둘러보고 나오는데 정렬대 위에 빨간 수술까지 달린 작은 담뱃대가 한 묶음 꽂혀있다.

너무나 앙증맞고 예쁘다. 옛 선조들이 사용하던 유품을 노리개로 만들어 판매하다니 어찌나 반갑던지. 하나를 들고 바라보는데 가슴이 하는 말, 네 어머니의 분신과 같은 담뱃대잖아 일러준다.

요즘은 연초 잎을 담아 피우는 사람이 없어 홀대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 선조들이 사용하던 물건이라 유적지에서는 이렇게 간혹 만날 수 있다. 소중한 유물을 발굴한 기분이다. 어느 문화유산이 이보다 더 귀하랴. 사용하는 사람은 없지만 이렇게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음이 고마웠다.

관광지에서 만날 적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이 맴돌았지만, 장식하기에 엉거주춤해 늘 망설이다 돌아섰는데, 오늘은 그냥 두고 올 수가 없다.

담배를 담아 불태우는 대꼬바리와 입에 물고 빠는 물부리가 녹슨 동같이 보이고 대롱은 오죽이라 오랜 시간 손때 묻은 것 같아 정이 더 간다. 보고 또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아 지갑을 열어 값을 지급했다. 내 모습은 이미 노을이 되어 소리 없이 물들어가고 있는데, 가슴에는 아직도 추억이 파랗게 피어나 장식품을 모으다니.

아버지와 어머니는 팔 길이보다도 더 긴 담뱃대로 담배를 피우셨다. 대청마루에 앉아 긴 담뱃대를 문 자태는 어른의 위엄이 풍겨 기품 있어 보일뿐더러 멋스럽기까지 했다. 놋쇠로 만든 재떨이에 재를 털을 제 처음에는 힘을 주어 때리다 점점 작아진다. 빈 대꼬바리를 힘 있게 두드릴 필요가 없어서이겠지. 새벽 잠결에 들리던 그 소리는 강약으로 들려 평화롭게 들렸다.

자주 보고 듣다 보니 어머니의 그날의 감정이 어떠한지를 담배 피우는 모습에서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기분 좋은 날은 재 터는 소리가 부드럽고 고운데, 심기가 불편한 날은 소리에 매듭이 맺혀 있었지. 그리고 연기를 뿜어내는 모습도 달랐다.

한가로운 날은 한 모금 크게 마셨던 연기를 천천히 혀끝을 모아 푸~후 푸~후 뿜으면 뽀얀 연기가 공중에다 그림을 그리는 묘기도 부리셨지. 그 모습은 참 여유로워 보였다. 또 심기가 불편한 날은 마셨던 연기를 긴 한숨과 함께 내뿜으면 앞으로 길게 날아간다. 그 모습은 연기와 함께 가슴에 쌓인 모든 시름이 날아가는 것으로 보였다.

담뱃대를 청소하는 아버지의 모습도 그립다. 담뱃대보다 더 긴 실실한 나락이 달렸던 홰기를 조심스레 대롱에 밀어 넣는다. 줄기가 빨대를 통과하는 동안 여러 갈래의 줄기에 까만 고약 같은 검은 진액이 신기할 정도로 많이 묻어 나온다. 그 시대도 병을 유발하는 독성인 담뱃진이 연기와 함께 폐 속으로 들어감을 막기 위해 긴 대롱을 선택했고 자주 청소하셨나 보다. 긴 대롱을 사용한 지혜가 놀랍다.

포만감도 없고 몸에도 안 좋은 쓴 담배를 어머니는 왜 그리 즐기셨나. 내가 쌉쌀한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여유롭게 즐기는 것처럼, 어머니도 담배 한 모금의 연기를 마셨다 내뿜는 여유를 즐기시기 위해서였나.

오늘따라 담배 연기처럼 사라진 옛 추억을 어머니와 교감을 나누고 싶어 대청마루에 앉아 긴 담뱃대 문 어머니를 상상하며 빈 담뱃대를 입에 물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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