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된 희망은 인간을 이중으로 괴롭게 한다
헛된 희망은 인간을 이중으로 괴롭게 한다
  •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 승인 2024.03.31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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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포럼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그리스의 신은 인간처럼 사랑하고 즐거워하며, 화내고 질투한다. 능력으로만 보자면 인간은 신에 크게 밀리지 않는다. 길쌈 솜씨가 뛰어난 아라크네는 기술의 여신인 아테나와의 길쌈 승부에서도 밀리지 않는다. 결국 아테나 여신의 노여움을 사 거미가 되어 일생을 거미줄을 짜면서 살게 되기는 하지만.

신과 인간은 모든 면에서 거의 비슷하지만 단 한 가지 극복 불가능한 차이가 있다. 그리스 신들은 죽지 않지만 인간은 죽는다. 그래서 인간=죽는 존재(brotos)이다.

신은 불멸(immortal)이지만 인간은 소멸하는(mortal) 존재이다. 곧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죽으면 지하 세계인 하데스에서 비참한 처지가 된다.

인간 중 가장 싸움을 잘하는 아킬레스는 이승에서 온갖 영화와 명예를 누리지만 인간인지라 죽음을 피하지 못하고 파리스의 화살에 아킬레스건을 뚫려 하데스로 내려간다. 하데스로 내려간 아킬레스는 지하의 세계에 들른 오뒷세우스를 보고 지하세계의 왕보다 남의 밑에 있더라도 차라리 살아 있는 것이 훨씬 낫다고 하며 죽은 후 인간존재의 비참한 처지를 토로한다. 죽음은 모두가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이 모두가 맞닥뜨려야 한다.

플라톤은 이런 인간의 처지를 딱하게 본다. 그는 인간을 동굴 속에 갇힌 죄수로 본다. 인간이 동굴 속에 갇혀 있다고 하는 건 몸에 매여 있다는 것과 같은 표현이다. 곧 몸이 발휘하는 감각적 즐거움에 빠지면 그에 속박되어 살다가 언젠가는 종말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몸을 받아 갖게 된다. 그런데 몸을 받는 순간부터 우리는 온갖 욕구에 시달리며 살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몸에 물들지 않은 영혼도 있다. 영혼은 원래 청정했으나 인간의 몸과 결합되어 태어남으로써 때가 묻어 있다. 그대로 두면 몸에 물든 영혼은 몸이 죽음에 따라 함께 소멸된다. 그렇지만 몸에 물들지 않은 영혼은 몸이 죽어도 죽지 않을 수 있다. 곧 영혼이 감각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영혼은 죽지 않을 수 있다. 인간이 죽어도 영혼을 죽지 않게 하려면 영혼을 몸으로부터 최대한 떼어놔야 한다. 영혼을 몸으로부터 떼어놓는 걸 정화(淨化)라고 하며 영혼 정화의 가장 좋은 방법이 철학이다. 이렇게 해서 서구의 철학이 시작된다.

플라톤은 철학을 통해 인간 영혼을 정화함으로써 신과 인간 사이에 엄연히 있던 불멸과 소멸의 간극을 뛰어넘고자 한다. 곧 철학을 통해 인간 내부에서 신적인 불멸의 요소를 개발할 수 있다고 본다. 인간은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내부에 있는 신적 요소를 개발하여 육체로부터 멀어지면 신과 같이 죽지 않을 수 있다. 영혼 정화 행위로서의 철학은 인간을 죽지 않게 할 수 있는, 곧 절망 가운데서 희망을 찾을 수 있는 이성의 작용이다. 이로부터 감성보다 이성, 육체보다 영혼을 중시하는 서양적 전통이 수립된다.

인간은 죽기 싫어한다. 죽지 않았으면 하는 인간의 욕구에 부응해서 플라톤은 인간 안에서 신적인 불멸의 요소를 개발하는 방법, 곧 철학을 처음으로 창시하여 죽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다. 몸은 죽으나 영혼이 정화되면 죽지 않을 수 있다는 플라톤의 철학은 죽을 수밖에 없는 절망적 처지의 인간에게 죽지 않을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준다.

이런 희망은 헛된 것이다. 죽음은 피할 수 없다. 죽을 수 없다는 건 고집이고 죽지 않을 수 있다는 건 헛된 희망이다. 죽는 것도 고통이지만 죽을 수밖에 없는데 죽지 않을 수 있다는 이룰 수 없는 희망을 갖는 것도 고통이다. 사람들은 죽는 고통만 느끼는데 플라톤의 후예인 (서양의) 철학자들은 죽지 않을 수 있다는 희망 고통을 덤으로 하나 더 얹고 산다. 인간이 맞닥뜨려야 하는 진정한 문제는 희망이 아니라 절망에서 찾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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