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드라마의 파괴적 상상력
역사드라마의 파괴적 상상력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10.25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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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정 규 호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현대 신화를 만든 고 정주영씨는 과감한 추진력과 관련된 일화가 많다.

그중 오늘날 한국을 세계 1위 조선강국으로 만든 조선업 창업과정에서의 '500원짜리 지폐'이야기는 참으로 절묘하다.

현재 최대 규모의 중공업회사로 성장한 현대조선소가 설립될 시기에 가장 큰 문제는 돈이었다.

1971년 당시 조선소 설립에 커다란 의욕을 갖고 있던 정주영은 선주도 나타나지 않은 상황에서 차관을 얻기 위해 무작정 영국을 향했다.

조선소 설립 경험도 없고 선주도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영국은행의 대답은 당연히 "NO"였다.

정주영은 그 때 바지주머니에서 500원짜리 지폐를 꺼내 A&P 애플도어의 롬바톰 회장을 설득했다.

"이 돈을 보시오. 이것이 거북선이오. 우리는 영국보다 300년 전인 1500년대에 이미 철갑선을 만들었소. 단지 쇄국정책으로 산업화가 늦었을 뿐, 그 잠재력은 그대로 갖고 있소"라는 재치를 통해 롬바톰 회장을 감동시키면서 해외차관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내는 저력을 보였다.

오늘날 한국을 세계 1위의 조선강국으로 만든 주춧돌은 이런 이야기의 힘에서 마련됐다.

500원짜리 지폐에서 거북선을 말하며, 다시 그 거북선을 통해 역사적 조선기술의 우수성을 설파한 이 이야기의 흐름에는 세계를 움직이게 하는 감동이 있다.

힘을 갖는 이야기의 바탕에는 대부분 역사가 있으며, 그 역사는 스토리텔링을 통해 늘 새롭게 해석되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

지금 르네상스를 방불케 할 정도로 사극의 열풍이 되살아나고 있다.

공중파 방송 3사가 앞다투며 대조영을 비롯해 태왕사신기, 왕과나, 이산은 물론 남북합작드라마인 사육신을 포함해 금요일을 제외하면 매일 TV를 통해 타임머신을 타고 있는 셈이다. 이들 드라마는 역사를 소재로 하고 있음에도 예전의 그것과는 분명히 다른 흐름을 보이고 있다.

역사적 실체로의 접근보다는 이를 통한 창의성의 부여가 가장 큰 특징으로, 심지어 태왕사신기의 경우 기존 사극과는 전혀 다른 대사기법을 적용함으로써 문제적 시도로 평가받고 있다.

이 때문에 이들 역사드라마를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이러한 배경에는 중국의 동북공정을 둘러싼 고구려 사극의 우국적 출몰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필자는 브레히트의 소외효과처럼 시간을 현재와 다른 지점으로 옮김으로써 대중의 일상적 의식을 일깨우는 수단으로 역사드라마를 대해야 한다는 주장에 무게를 두고 있다.

E.H 카는 그의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를 통해 '역사는 현재나 미래의 변화가 아닌 과거에 사회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간의 행위를 대상으로 한다'고 전제하면서 '역사가는 그가 속한 시대와 사회의 제약을 받기 때문에 역사적 사건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기준은 그 당대의 가치관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고, 따라서 이 기준은 역사가의 관점 또는 시대와 사회에 따라 다를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드라마에서 역사적 진실과 실체를 파악하려는 시도보다는 역사를 통해 변화를 읽어내고 새로운 창의력을 발휘하는 수단으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이 E.H카 주장의 속뜻에 담겨있다.

드라마가 역사교과서와 다큐멘터리와는 차별성을 가져야 함은 이미 한류열풍에서도 입증된 바 있다.

역사를 박물관의 유물처럼 실체적 진실 내지는 박제화 하는 데 골몰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오히려 역사를 원형으로 풍부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파괴적 창의력이 더욱 필요하며, 이야기의 진정한 힘을 통한 신화창조의 가능성은 그곳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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