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리지 못한 달력
걸리지 못한 달력
  • 김순남 수필가
  • 승인 2023.12.04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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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순남 수필가
김순남 수필가

 

아들이 새해 달력을 가지고 왔다. 달력을 받고 보니 어느새 한 달만 지나면 또 한 해가 다 가고 새로운 해를 맞아야 한다는 많은 생각들이 스친다. 지난 일 년을 돌아보며 소중한 무엇을 잃어버린 듯하다.

달랑 한 장 남은 달력에서 이미 떼어내 없어진 열한 달의 날짜들이 궁금했다. 지나간 시간 들은 되돌릴 수 없지만 글씨로 새겨진 지난 열한 달의 날짜들은 볼 수 있지 않을까. 찾아보니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달력이 그대로 있었다. 그랬다. 벽에 걸려보지도 못한 달력 하나가 빳빳한 모양으로 있는 게 아닌가. 한 장 두 장 넘기다 보니 달력이 참 마음에 들었다. 문화예술연합회에서 제작한 달력답게 한 장 한 장마다 위쪽 한편에 꽃 그림이 배치되어 있고 그 옆 왼쪽으로는 짤막하게 좋은 글 문구가 쓰여있다. 그림 밑에는 지나간 달을 볼 수 있게 글씨가 조금 작게 인쇄되어 있고 가운데는 글씨가 조금 크게 인쇄되었다. 아래쪽에는 다음 달을 미리 보라는 의미로 석 달이 한 장에 담겨있다. 늦었지만 매월 장마다 그려진 꽃과 글귀를 마음에 담아 보았다.

예전에는 달력이 귀했다. 연말이 되면 아버지는 장에 다녀오면서 달력을 구해오셨다. 절기나 농사 일정들을 살펴보고 들며 날며 잘 보이는 마루에 걸어두셨다. 달력의 구성이나 그림 등도 어떤 업체에서 주문했는지에 따라 달랐다. 한복을 곱게 입은 배우들 사진이 인쇄된 달력은 여자들이 좋아해 주로 안방에 걸렸다. 한 장 가득 한 달의 날짜들만 크게 인쇄된 달력은 음력 날짜도 큰 글씨 밑에 있고 절기나 기념일 등도 세세하게 표시되어 있어 어른들이 좋아하셨다. 나도 결혼 후 거래하는 은행에서 받는 달력이 작가들의 그림이 너무 좋아 연말이면 놓치지 않고 꼭 달력을 챙겨 받아왔다. 일 년을 그림을 보고도 아까워 잘 오려서 벽에 붙여놓기도 했다.

사용하지 않은 달력이 다시 봐도 아깝다. 매달 달력을 넘기며 꽃 그림과 글귀로 마음이 촉촉하게 물들었을 것 같다. 아마도 두 아들이 가져다준 달력과 성당 달력을 먼저 받아서 걸어둔 후 늦게 들어온 달력은 벽에 걸려보지도 못하게 되었지 싶다. 어쩌면 자식들이 다니는 직장 달력을 걸어놓고 달력을 볼 때마다 두 아들을 생각하려는 마음이 깊이 자리 잡고 있어 이 달력은 눈에 띄지 않았는지 모를 일이다.

어찌 달력뿐이랴. 나와 가까운 이를 우선으로 생각하느라 다른 이들의 좋은 점들을 못 보고 느끼지 못하고 지나가는 일들이 많으리라 여겨진다.

얼마 전 성당 교우들과 2박3일 여정으로 제주도 `산들 평화 피정'을 다녀왔다. 십여 년을 같은 성당에서 수없이 스쳤을 터인데 처음 보는듯한 낯선 분들과 같은 공간에 묵게 되었다. 한 자매는 성당 교우들을 위해 농사지은 채소며 농작물을 알게 모르게 많이 내어놓고, 성당에 일손이 필요할 땐 기꺼이 나서서 소매를 걷어붙이는 그런 분이란걸 알게 되었다. 소탈한 차림의 그녀가 새로운 모습으로 곱게 다가왔다.

삼백예순다섯 날을 선물로 받은 셈이다. 일 년, 한 달, 일주일, 하루하루 소중한 것들을 놓치지 않고 가족들과 이웃들과 아름답게 채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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